일본 오타쿠가 우체통에서 발견한 데리다의 편지
일본 오타쿠가 우체통에서 발견한 데리다의 편지
  • 이승엽 기자
  • 승인 2015.09.06 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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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는 어떤 종류의 저자입니까? 실패한 이론가입니까? 이론가가 아니라면 그는 도대체 뭐하는 사람입니까?”

▲ 존재론적, 우편적
-자크 데리다에 관하여
아즈마 히로키 저/
조영일 옮김/ 도서출판 b/
422쪽/ 2만 5천 원

1992년 영국 케임브리지대가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에게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하기로 결정했을 때, 이에 반대했던 교수들이 던진 말이다. 29년 동안 단 한 번도 이의가 없었던 전통이 깨지고 학위 수여 문제는 투표에 부쳐졌다. 결국 데리다는 투표를 통해 고작 60%의 찬성표로 학위를 받았다. 그만큼 데리다의 연구에 대한 평가가 학계에서조차 합의되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도 데리다에 대해 한쪽에서는 ‘해체주의의 선두주자’라고 평가하는 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허풍과 애매한 표현으로 가득 찬 사이비 철학자’라고 말한다. 이는 그가 ‘전제’를 부인하는 철학자였기 때문이다. 플라톤 이래 유럽철학, 즉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과 함께 그는 철학의 논리학 자체를 거부하는 해체주의를 주장했다. 그의 해체주의는 오랜 기간 축적된 사상이라는 철학의 전제를 부인하고 그것의 불확정성을 주장해 철학의 토대를 재구축하자는 내용을 담고 있다.

1998년 일본의 한 젊은 비평가 아즈마 히로키는 이런 기묘한 주장을 펼친 데리다를 심층 연구한 첫 저작 『존재론적, 우편적』으로 일본 사상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이 책 한 권으로 ‘가라타니 고진의 후계자’라는 별칭을 얻은 그는 ‘왜 데리다는 기묘한 텍스트를 쓴 것일까?’라는 물음에서 시작해 데리다의 해체주의를 분석했다. 그리고 일본을 뒤흔든 데리다 연구서는 17년이 지나 조영일 평론가의 번역으로 한국에 출간됐다.

데리다를 이해하기 위해 아즈마 히로키는 데리다의 저작 『우편엽서』를 출발점으로 삼는다. 『우편엽서』에서 데리다는 철학자를 우체국에 빗댄다. ‘개념(우편물)이 철학자(우체국) 사이로 계속 배달돼 간다’는 것이 철학에 대한 데리다가 가진 이미지다. 새로운 개념을 제출하고 이것이 새로운 철학적 고유명이 되는 것, 그것은 새로운 ‘우편물’을 새로운 ‘우체국’으로 발송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모든 부정가능성을 염두에 둔 데리다의 사유는 오히려 배달의 불확정성, 즉 행방불명된 우편물로 향한다. 데리다는 “그것은 결국 도착하지 않는다는 것, 애당초 처음부터 도착하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데리다의 관점에서 철학자가 쓴 글, 즉 우편물은 그의 생각대로 정확히 기록됐다고도, 그 사람의 의도대로 읽혔다고 보기도 힘들다는 것이다. 저자는 우편물이 처음부터 잘못된 ‘우편시스템’(철학) 안에서 떠돌고 있다는 것이 데리다 사상의 핵심이라고 분석했다.

이는 우편시스템을 맹신하고 “우편물은 반드시 도착한다”고 말했던 유럽 전통의 형이상학 철학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주장이었다. 아즈마 히로키는 이 책에서 데리다가 존재와 표상의 이원론으로 돌아가는 형이상학의 맹점을 간파하고 ‘행방불명된 편지들’의 다원적 가능성에 주목한다고 본다. 데리다는 이를 통해 전통적인 서양사상이 가진 독선과 아집에 저항하고자 했다는 주장도 이어진다.

이를 중심으로 저자는 현대 철학사상을 거슬러 올라가며 해제한다. 그는 데리다를 경유해 라캉, 푸코, 들뢰즈 등 20세기 후반을 주름잡은 프랑스 철학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며, 결국 전통적인 존재론에 막대한 영향을 준 하이데거로까지 소급한다. 저자의 분석은 다음과 같다. 하이데거가 전통의 해체를 통해 오히려 본래성으로 돌아가 숨겨진 우편물을 찾으려 했다면, 데리다는 그 본래성에도 의구심을 품고 어떤 원초적인 중심을 의심하며, 체계를 ‘완전히’ 재구축할 것을 주장했다. 이러한 데리다의 해체주의 관점을 그는 책의 제목인 ‘존재론적, 우편적’ 재구축이라 명명한다. ‘왜 데리다는 기묘한 텍스트를 쓴 것일까?’라는 단순한 물음에서 시작된 이 책은 철학의 의의, 나아가 철학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려 한다.

그는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데리다파의 문제를 다루기에는 나는 너무나 깊이 데리다에 전이되어 있다 …(중략)… 그러므로 갑작스러울지 모르지만 이 작업은 이제 중단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고백한다. 실제로 『존재론적, 우편적』 이후 저자는 철학과 같은 무거운 주제가 아닌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등의 서브컬처* 연구에 몰두한다. 어쩌면 그도 데리다처럼 기존의 철학이라는 무거운 전통에서 벗어나 새로운 ‘철학’의 가능성을 찾고자 한 것은 아닐까. 이러한 고민의 시작점이라는 점에서『존재론적, 우편적』은 한국에서 훌륭한 데리다 연구서이자 해체주의를 중심으로 현대철학의 현주소를 가늠하는 시금석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서브컬쳐 : 어떤 사회의 전체적인 문화, 주요 문화에 반대되는 부분적 문화. 전체 문화 내부의 독자적인 하위문화를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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