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희(산업공학과·09) 총문학연구회

대관령

김근희(산업공학과·09) 총문학연구회

시작은 사고였다. 오른쪽 앞바퀴에서 쇠를 신경질적으로 긁는 소리가 들렸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걸 무시하고 출발한 게 화근이었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것은 커브길에서 들렸던 카잉-탕, 하는 요란한 소리였다. 둔탁한 망치로 얻어맞은 듯 오른쪽 귀가 얼얼했지만, 욕을 내뱉을 새도 없이 시계가 급격하게 왼쪽으로 기울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차가 산 아래로 굴러간다는 걸 깨달았다. 붕 뜨는 느낌과 함께 사방의 충격이 나를 죽일듯이 흔들었다.

자동차는 산길에서 튕겨 나와 몇 바퀴를 구르고야 멈춰선 것 같았다. 주위는 암흑이었다. 골이 얼얼했지만 무의식적으로 안전벨트를 풀고 지렁이처럼 차에서 빠져나왔다. 정장바지와 셔츠가 차체에 긁혀 넝마가 되었고 상처 때문에 온 몸이 따끔거렸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처음 드는 생각은 살았다는 것이었다. 멍한 정신을 붙잡고, 엎드린 채 침을 뱉고 뒤를 바라봤다. 4만 킬로미터를 달린 2010년형 페라리가 찌그러진 깡통 꼴이 되어 있었다. 저곳에서 살아나왔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여자. 그렇지만 곧 옆좌석에 있었던 여자에게 생각이 미쳤다. 나는 황급히 차로 돌아갔다. 하지만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정신을 추스르고 보니, 꽤 먼 거리를 굴러 내려온 것 같았다. 맨 처음 든 생각은 그녀가 차 밖으로 튕겨져 나온 가능성이었다. 도로에 가로등은 없었다. 산 위를 쳐다봐도 길은 보이지 않았고 아래로 얼마나 떨어졌는지도 알 수 없었다. 조명은 희미한 달빛이 유일했다. 핸드폰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그녀가 차에서 튕겨져 나왔다면 중상을 면치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드니 등줄기가 아찔해졌다. 그렇지만 산의 경사는 꽤 가팔랐다. 굴러 내려온 길을 다시 올라가 여자를 찾아보는 건 엄두가 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모르는 사람이었다.

퉤. 나는 다시 침을 뱉었다. 피맛인지 모를 비릿함이 느껴졌다. 허벅지 깊숙한 곳에서 통증이 엄습했다. 고개를 조금만 돌리니 목에서도 근육을 쥐어짜는 고통이 느껴졌다. 다시 돌이켜봐도 그런 불길해 보이는 여자를 태우는 게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를 태우지 않았더라면 주유소 카센터에라도 들릴 수 있었을 테지만, 바람을 쐬고 싶다는 음울한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 게 후회스러웠다.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숲은 칠흑처럼 어두웠고 끈적이는 습기와 땀이 온 몸을 옥죄고 있었다. 옷이 무거웠다.

솔직히 말해서, 여자는 예뻤다. 예쁘지 않았다면 차에 태우지도 않았을 것이다. 여자의 피부는 창백할 정도로 하얬지만 입술만큼은 붉은빛이 선명했다. 딱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었다. 강원도로 가는 초행길이었는데 고속도로나 터널로 가지 않고 산을 넘는 국도를 타기로 한 건 오로지 여유를 즐기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중요한 프로젝트가 끝난 후 맞는 첫 휴가였는데, 도로를 달리다 히치하이킹이라도 하는 사람을 만나면 어쩌지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딱 그녀가 시야에 나타났다. 택시를 잡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손짓은 히치하이킹과는 거리가 멀어보였지만 어쨌든 여자는 내 스타일이었다. 나는 창문을 내리고 그녀에게 혼자 길에 있는 건 위험하다고 했다. 나는 걱정이 된다는 시늉을 하며 여자에게 어디까지 가냐고 물어봤다. 그녀는 대답했다.

 

"그냥 바람을 좀 쐬고 싶어서요.“
 

그녀는 차에 타는 게 좋겠다는 내 제안을 수락했다. 여자는 말이 많은 타입은 아니었다. 나는 그녀에게 예쁘다는 칭찬을 아낌없이 하면서 말을 붙였음에도 그녀는 조용한 어투를 유지하며 짧은 대답으로만 응수했다. 여자는 쉽지 않았다. 그럴수록 이상하게 오기가 생겼고 나는 가려는 곳이 어디인지, 그곳까지 데려다 드릴까요, 같은 질문들을 하며 호의를 베풀어봤지만 그녀는 희미하게 괜찮다고만 했다. 여자는 할 말이 없는 듯 머리만 귀 뒤로 넘겼다. 나는 괜히 머쓱해져 한동안 운전에 집중하는 시늉만 했다.

얼마나 달렸는지는 모르겠으나 하늘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때까지 내가 알아낸 것은 여자의 나이와 목적지, 이름뿐이었다. 무슨 일을 하는지도 물어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힐끗힐끗 훔쳐 본 여자의 옆모습은 아름답고 이뻤지만 흠이 있다면 색채가 없어 보인다는 것이었다. 무채색의 얼굴은 백치의 그것이라기보다는 생각 많은 이의 굳은 표정이었다. 나는 어색함을 걷어내는 가요를 틀면서 밝은 어투로 계속 더 말을 붙여봤다. 어쨌든 지루한 건 질색이었고, 여자는 예뻤으니까. 완연한 저녁이 될 즈음 차는 드디어 산길로 접어들었다. 헤드라이트가 도로 위에 길게 늘어졌다. 여자의 대답도 점점 길어지는 것 같았다.

 

"한대 필래요?“

 

이십분 정도 꼬부러진 커브길을 올라가다 보니 우리는 금방 오르막의 끝에 도착했다. 정상 부근에서 담배를 건네며 물어봤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대신 옆에 있어주겠다고 했다. 산 정상에는 차를 대고 쉴 만한 한적한 휴게소가 있었고, 나는 잠시 주차를 하고 담배를 폈다. 주차장 공터에서는 어둑한 산골짜기의 실루엣이 한 눈에 들어왔다. 눈 아래 펼쳐져 있는 풍경을 보며 산공기와 담배연기를 허파 끝까지 깊숙이 빨았다. 머리가 핑 돌았다. 여자는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붙잡으며 더 높은 산봉우리를 보고 있었다. 무엇을 두고 온 것 같은 시선이었다. 그러다 문득 쌀쌀한 냉기가 등을 타고 올라왔고, 여자가 입은 흰색 무지 티와 얇은 아이스 진으로는 추울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여자에게 겉옷을 벗어줄까 하고 물어봤다. 그러나 여자의 반응은 예상 외였다. 그녀는 산 끝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뭐지? 그녀의 반응이 난감했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입을 굳게 다문 채 내 미간 언저리를 뚫어지듯 응시했다. 이윽고 여자가 말했다.

 

"...생각보다 친절하시네요."

"네? 아, 네.“

 

대화는 그게 전부였다. 나는 여자의 직업이 서비스업과는 분명히 거리가 있을 거란 생각을 했다. 빨려 들어갈 듯한 산골짜기에서 끼악거리는 새 울음소리가 들렸다. 밤이 되면서 산공기는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여자는 힘없는 목소리로 잠깐 산책을 다녀오고 싶다고 했다. 나는 알았다고 했고, 그 사이에 나도 화장실을 다녀왔다. 어디에서든 화장실을 갈 수 있을 때 가는 것은 내 오랜 버릇이었다. 다녀오고 보니 여자는 어느새 조수석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앞바퀴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던 것은 내려가는 길에서 부터였다. 부드럽게 굴러가던 페라리에서 쇠와 쇠가 긁히는 듯 끼이이-딱, 하는 소리가 흐릿하게 들렸다. 타이어가 한 바퀴 굴러갈 때마다 기분 나쁜 소리는 커지는 것 같았고, 차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걱정됐지만 여자는 대수롭지 않은 듯했다. 괜히 호들갑을 떠는 게 아닌가 싶어 나는 일단 애써 태연한 척으로 운전을 계속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미친 짓이었다. 나는 결국 여자에게 소리가 이상하지 않냐고 물어봤다. 그녀는 들린다고 했다. 그러나 별 일 없을 거라면서 계속 달리자고 했다. 우리는 그렇게 달린 것이다. 그 말이 있은 후 오 분도 안 되어서, 차는 추락했다.

숲은 여전히 암흑이었다. 기억하기로 차에 남은 기름은 거의 없었지만 나는 영화에서만 보던 2차 폭발이 두려워 조금 떨어진 곳에서 힘없이 앉아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지는 알 수 없었다. 10분? 1시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산은 정신까지 앗아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벨소리가 숲의 적막을 뒤흔들었다. 나는 턱 끝까지 소름이 돋을 정도로 깜짝 놀랐다. 전화는 불과 몇 십걸음 앞에서 밝은 빛을 뿌리며 울리고 있었다. 벨소리는 내 벨소리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여자의 핸드폰이 아닌가. 날카롭게 울리는 벨소리는 전신을 일제히 긁는 듯 했다. 잠시 망설였지만, 핸드폰이 있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연락을 할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나는 땀으로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걷어 올리면서 핸드폰이 울리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발을 내딛고 더듬더듬 몇 걸음을 가는 중에 전화는 꺼졌다. 나는 어둠에 적응한 눈으로 빛의 잔상을 따라 핸드폰 쪽으로 가 보았다. 다행히 나무 등걸 바로 밑에 있는 전화기를 찾을 수 있었다. 액정에 붙어있는 나뭇잎과 벌레를 떼어내며 핸드폰을 드는 순간 다시 전화가 울렸다. '김실장'이라는 이름이었다. 나는 주위를 둘러봤지만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벨소리를 제외하고는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잠깐 고민하고, 나는 전화를 받았다. 그 순간이었다. 전화를 받기 위해 핸드폰을 기울인 순간 다섯 걸음 쯤 옆에 누가 미동 없이 누워있는 게 보였다.

"씨발년아!! 너 씨발 어디야 지금. 바른대로 지금 있는 곳 안대? 나 좆되게 해놓고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넌 씨발 내가 반드시 찾아내서 창자를 씹어 먹을거야 썅년아!!"

전화기 건너편에서 악에 받힌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름끼치는 고음과 비명에 놀라서 나는 전화기를 떨어뜨렸다. 땅에 떨어진 상태에서도 목소리는 순수한 악의를 있는 힘껏 토해내고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나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건 분명 여자의 구두였다. 나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고 여자가 있는 곳으로 갔다. 그리고 핸드폰 액정의 흐릿한 빛으로 여자를 확인했다. 역시, 여자는 죽어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죽지 않으면 이상할 정도로 목이 기괴하게 꺾여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혐오스러운 벌레를 보는 듯한 표정이 저절로 지어졌다.

▲ 삽화: 이종건 기자 jonggu@snu,kr

아. 나는 다시 힘이 빠져 자리에 주저앉았다. 엉덩이가 질퍽질퍽했다. 온갖 상념이 들었지만 그래서 역설적으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단지 지금 있는 일이 평생에 걸쳐 한 번 있을까 말까한 일이라는 건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여자가 했던 말들이 생각났다. 그러니까 바람을 쐬고 싶다고 했지. 그게 무슨 개떡같은 소린지. 나는 하늘을 바라봤다. 어린아이의 손톱 같은 그믐달이 검은 잎 사이로 희미하게 보였다. 그 아래, 보이지 않던 도로의 윤곽을 드러내며 멀리 차 한대도 산 중턱을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문득 구두를 신고 있는 여자의 발목이 생각났다. 그리고 다리도 생각났고, 그 위에 있는 허리와 가슴과 가녀린 어깨도 생각났다. 기억나는 여자의 이미지는 조수석에서 다소곳이 앉아있는 모습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여자의 웃는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 한 번은 웃었는데. 인상을 찡그리면서 여자의 웃음을 떠올리려고 노력했지만 언제 여자가 웃었는지 정확히 떠올릴 수 없었다. 입에 침이 고였다. 퉤. 나는 일어나 여자의 머리를 걷어찼다. 여자의 머리가 덜 기괴하게 꺾였다. 나는 보이지 않는 도로를 향해 걸어갔다. 곧 허벅지의 통증이 심해져 거의 기어가다시피 경사를 올라가야 했다. 무릎과 손바닥에 피가 흐르는 것 같았다.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