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으니, 천지창조의 날에 말씀은 곧 현상이었다. 그러나 인간의 언어는 그것과 같지 않아서, 말과 사태가 비끌리는 것을 막을 길이 없다. 게다가 오늘날 이 간격은 점점 더 벌어지고 있는 듯하다.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이 아니고, “만지긴 했”지만 성추행은 아니며, ‘창조 경제’에는 창조가 없고, ‘진짜 사나이’에는 진짜가 없다. 분야와 계층을 막론하고 말이 이렇게 가볍다. 이를 어쩌나, 로고스의 신성함이 자꾸만 그 빛을 잃어만 가니.

허나 너무 괴로워들 마시라. 저들은 이 번잡한 시대에 어울리는 말하기를 몸소 수행하고 있는 것뿐이다. 나라를 대표하는 ‘그 분’의 말하기야 하나의 화법을 수립할 정도로 유명해 더 언급할 것이 없지만, 어느 당 대표의 근래 발언들 역시 흥미로운 사례다. 나는 그가 어쩌면 포스트모더니즘을 다분히 자기만의 방식으로 오인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봤는데, 이때 나는 문예학자인 페터 지마의 저서 『모던/포스트모던』의 내용을 염두에 두고 있다.

설명하자면 이러하다. 지마는 포스트모더니즘을 일종의 문제의식으로 이해하면서, 동시대의 문제 상황으로 애매성, 양가성, 무차별성을 꼽는다. 즉, 이 시대는 진리를 상실했으며 이제 온전히 인식 가능한 것은 없다(애매성). 여기서 모든 가치는 뒤엉켜 선악이 공존하는데(양가성), 이러한 혼란을 수습하기보다 질문을 중단하고 다원성으로 나아가려는 태도(무차별성)를 지마는 포스트모던이라 부른다. 당 대표의 말들이 이런 언저리에 있다. 모 장관이 외친 “총선 필승” 앞에 주어가 없다는 사실을 지적할 때 그는 우리 정치판의 ‘애매함’을 직시하고 있으며, 사측의 일방적 자본철수로 대규모 정리해고가 발생한 콜트콜텍과 “건실한 회사”를 등가에 놓는 그의 ‘양가적’ 발상은 기발하다. 그 뿐인가. 쇠파이프 운운하며 노조를 비판하는 그의 언사는 (단어 선정 자체로도 ‘무차별적’이지만) 그가 얼마나 진실에 무감한지를 보여준다.

저러한 말에는 사안의 옳고 그름에 대한 관심이 없어서, 말들은 사태를 벗어나 실낱처럼 날린다. 우리는 과연 저 ‘(유사)포스트모던적’ 말들을 용인할 수 있을까. 고루한 나에게는 저 말들이 너무나 위태로워 보여서, 나는 저들에게 책 한 권을 권하고 싶어진다. 자신의 말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모르는 이들에게 조르조 아감벤의 『언어의 성사』가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책은 ‘맹세’라는 말 현상을 통해 인간 언어의 결핍성을 긍정하면서도, 동시에 신의 언어로 나아가려는 인간의 노력을 포착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맹세를 한다는 사실은, 말이 본래적으로 깨어질 수 있는 것임을 전제하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맹세를 한다는 사실은, 사람들이 본성적으로 말을 옳게 만들고자 애씀을 증명한다. 곧 맹세는 “인간의 언어를 가급적이면 최대한 진실하게 함으로써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저 신적인 모형과 일치시키려는 시도”(50쪽)다. 그러한 공들임 속에서 말과 사태는 다시 가까워질 것이다.

그러나 도저한 망언들 속에서 우리는 과연 태초의 말로 돌아갈 수 있을까. 가장 진실한 말의 실례를 알고 있다는 사실이 내겐 약간의 위로가 된다. 가령 1968년 1월 6일 파블로 네루다의 연설. 그는 연설의 말미에 피사과(Pisagua) 수용소에 수감됐던 628명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른다. 그 이름들은 죽고 상한 인물들 한명 한명을 어떤 왜곡도 결여도 없이 지시한다. 그 말들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아픔과 알 수 없는 슬픔이 함께 담긴다. 그렇게나 본래적인 말도 있다. 그리고 바로 오늘날은 그 말의 빛이 더없이 필요한 시대가 아닌가.

 

삽화: 이종건 기자 jonggu@snu.kr

백수향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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