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발장은행이 하루 빨리 문 닫는 그날까지
장발장은행이 하루 빨리 문 닫는 그날까지
  • 최하영 기자
  • 승인 2015.10.10 22: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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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4만명의 장발장을 위한 은행

만삭의 아내는 밤에 갑자기 진통을 호소했다. 당시 무면허 상태였지만 남편은 그런 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는 병원 쪽으로 차를 몰다 신호를 지나쳐 경찰에 적발됐다. 도로교통법 위반으로 나온 벌금은 200만원. 30일 내에 완납하지 않으면 교도소로 끌려가야 할 형편이었다. 하지만 그는 실직해 정부의 긴급생계비로 근근이 생활하는데다 아내의 병원비를 내느라 돈은 바닥난 상황이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는 ‘장발장은행’의 문을 두드렸다.

벌금형을 선고받았지만 벌금을 내지 않아 교도소에 갇히는 사람들이 매년 4만명이 넘는다. 돈이 없어 벌금을 못 낸 사람이 대부분이고, 이들 중엔 차상위계층, 장애인, 청소년 가장들과 같이 딱한 사정을 가진 사람도 많다. 이들에게 돈을 무이자·무담보로 빌려주는 은행이 있다. 경미한 범죄 때문에 감옥살이까지 하게 된 ‘장발장’들을 위해 만들어진 장발장은행이다.

 

은촛대 대신 대출을
 

장발장은행은 벌금형을 선고받고 경제 형편을 이유로 벌금을 내지 못해 교도소에 가야 할 위기에 놓인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 인권연대가 지난 2월 설립했다. 3월 초 공식 업무를 시작해 꼭 7개월이 됐다. 7일(수) 기준으로 258명에게 5억173만원을 빌려줬다.

벌금형을 받은 사람은 현행 형법상 벌금을 30일 내에 완납하지 않으면 최대 3년간 노역장에 복무해야 한다. 대검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벌과금(벌금과 과료 등을 포함)을 내지 못해 노역장에 유치된 이들은 4만281명에 달한다.

장발장은행은 애초 벌금형 제도 개선을 위해 시작한 ̒43,199̓ 캠페인에서 출발했다. ‘43,199’는 2009년 노역장 유치 건수를 의미한다. 장발장은행은 당장 벌금을 내지 못하는 이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은행제도를 응용했다. 장발장은행 오창익 대표는 “돈이 없어 경미한 범죄로도 교도소에 가야 하고, 이 때문에 가정이 파괴되고 생존기반이 없어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고 꼬집었다.

벌금을 못 낸다고 무작정 빌려주는 건 아니다.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등 7인으로 구성된 대출심사위원회가 신청서를 꼼꼼히 심사한다. 신청자 중 대출을 받는 비율은 15%가량이다. 소년소녀가장이나 미성년자, 기초수급권자와 차상위계층은 우선 심사 대상이다. 음주운전, 성범죄, 대포 통장 관련자 등은 심사에서 통과하기 어렵다. 대출심사를 통과하면 장발장은행은 최대 300만원까지 대출해준다. 대출조건은 6개월 거치(대출금을 일정기간 상환하지 않는 것) 후 1년간 균등분할 방식으로 상환하는 것으로, 무담보·무이자 대출이다.

장발장은행은 ‘가난한 자들을 위한 가난한 은행’을 표방한다. 자본금 없이 시작했고 이자놀이도 하지 않는다. 장발장은행은 100% 기부에 의존해 운영된다. 7일 기준으로 1,760명의 개인, 단체, 교회로부터 모두 4억3,989만원의 기부금이 모였다. 처음엔 대출을 해줘도 갚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도 많았고, 대출금이 5억이 넘어가면서 잔고는 마이너스가 됐다. 그러나 대출자 258명 중 6명이 대출금 전액을 이미 상환했고, 대출금을 갚기 시작한 사람도 90명에 달한다. 장발장은행 운영위원 한정숙 교수(서양사학과)는 “몇 달이 안 됐지만 본인이 아주 성실히 노력해 벌써 대출금을 다 갚은 경우들을 보면 우리의 기대가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힘 실리는 벌금형 제도 개선
 

장발장은행은 지금은 구제를 위한 대출을 하고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벌금형 제도를 개선해 더 이상 장발장들이 나오지 않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현행법 하에선 벌금형을 선고받으면 30일 내에 일시불로 완납해야 한다. 하지만 목돈을 당장 마련할 여건이 안 되는 사람들의 사정을 참작해 벌금형 제도를 바꿔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돼왔다. 오창익 대표는 “잘못된 제도로 피해받는 사람이 많다”며 “법과 제도를 조금만 고치면 단지 돈이 없어서 교도소에 가는 사람의 수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장발장은행 출범은 답보상태에 머물렀던 벌금형 제도 개선의 촉매제가 됐다. 지난 6월에는 장발장은행 100일을 맞아 국회에서 ‘국회로 간 장발장’ 행사를 개최했다. 여야 국회의원 4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장발장은행에 대한 사회의 관심을 호소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현재 국회에는 벌금형 제도 개선을 위해 여러 법안이 발의돼있다. 새정치민주연합 홍종학 의원은 지난 6월 벌금형에도 집행유예를 도입하고 벌금을 분할납부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은 형법 개정안(장발장법)을 대표 발의했다. 현행 형법 제62조 1항은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형에 대해서만 집행유예를 적용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제도상으로는 징역형이 벌금형보다 무거운 형벌이지만, 현실적으로 반대인 경우가 많다. 벌금형은 재산상의 손해를 감수해야 하고, 벌금을 내지 못하면 징역형과 다름없는 노역장 유치를 당하기 때문이다. 돈이 없는 사람은 몸으로 때울 수밖에 없다는 목소리가 커지는 이유다. 홍종학 의원은 “벌금형 집행유예와 분할납부에 대해서는 공감대가 이뤄져 올해 중엔 통과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고 밝혔다.

소득에 따라 벌금을 차등적으로 부과하는 일수벌금제도 이상민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이 발의한 상태다. 우리나라는 피고인의 재산 상태와 관계없이 벌금이 부과되는 총액벌금제를 채택하고 있다. 이에 비해 일수벌금제는 국민연금이나 건강보험처럼 피고인의 소득과 재산에 따라 벌금을 부과하는 것이다. 실제로 독일을 비롯한 여러 유럽 국가들은 일수벌금제를 채택하고 있다. 홍종학 의원은 “일수벌금제에 대해선 입법 발의는 돼있지만 찬반양론이 있어 사회적 공감대가 필요한 상황”이라며 “현재 법제사법위원회에서 계속 논의 중”이라고 말했다.

장발장은행의 최종 목표는 더 이상 대출해줄 일이 없어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이다. 한정숙 교수는 “장발장은행에서 대출을 받는 이들은 단 한 번도 사회로부터 따뜻한 손길을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라며 “이런 사람들에게 사회가 도움의 손길을 한 번이라도 건네 보는 것이 우리 사회의 인간적인 성숙을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한다”고 전했다.

 

 

 

 

최하영 기자

choihy@snu.kr

삽화: 이종건 기자

jonggu@snu.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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