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론정보학부 이성민 강사

명절이 지났다. 명절에는 평소에 만나지 못하던 여러 친척들을 만나면서 그야말로 뒷담화의 장이 활짝 열린다. 오랜만에 많은 관계들의 역동을 직접 보거나 여러 경로로 듣는 과정에서 이런 저런 비평(?)과 토론이 한바탕 벌어지는 것이다. 나는 이 기회에 뒷담화의 ‘질’을 나눠보기로 했다. 이왕에 피할 수 없다면, ‘나쁜 뒷담화’와 ‘그나마 나은 뒷담화’를 구분해서 가능하면 후자에 더 많은 힘을 쏟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리하여 나온 기준은 다음과 같다. 그것이 ‘혐오를 위한 말’인가, 아니면 ‘이해를 위한 말’인가의 문제다.

뒷담화가 즐거운 이유 중 하나는, 상대에게 특정한 나쁜 성격을 전가함으로써 나에게 그 성격이 없음을 상상적으로 확인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이때 그 상대방은 나와 공유하는 속성이 없기에 마음껏 미워할 수 있는 대상이 된다. 미움을 유지함으로써 나는 그 나쁜 성격들로부터 분리될 수 있고, 그것은 나의 도덕적 우월성을 지켜주게 된다.

이런 방식의 뒷담화를 ‘혐오를 위한 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혐오’가 작동하는 방식이 이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혐오는 보다 적극적으로 부정적인 어떤 속성을 특정 집단으로 전가하고, 이를 통해 우리는 더 나은 존재가 된다. 모든 문제는 저들의 존재 때문이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선 그 존재 자체를 없애야 한다. 물론 그들이 없어진 뒤엔, 또 다른 대상을 찾아내야 한다. 그래야만 내 안의 부정적인 요소들을 부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해를 위한 말’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상대의 잘못은 그가 악인이어서가 아니라, 몇 가지 조건들이 맞물려 상호작용한 결과로 파악될 수 있다. 일종의 ‘조건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필연적으로 ‘나라면 어땠을까’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나도 저런 상황이었으면 저렇게 했을까, 내가 안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고민이 지나고 나면, 여전히 그는 얄미운 사람이지만 적어도 ‘이해’ 가능한 존재로 다가온다.

문제는 일단 이해를 하고 나면 그 대상을 미워하는 일이 좀 더 어려워진다는 데 있다. 내 분노가 정당하기 위해선 그가 천하의 몹쓸 사람이어야 하는데, ‘그럴 수도 있다’는 마음이 들고나면 내가 더 이상 화를 내기 어려워진다. 뒷담화의 쾌감을 높이기 위해서는 혐오를 위한 말이 더 효과적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미움을 유지하기 위해선, 이해를 유예해야 한다.

서로의 처지에 대해, 서로의 고통에 대해 이해하는 것보단 서로 혐오하는 것이 종종 더 쉬운 선택이 되는 것도 이러한 이유다. 복잡한 현실의 문제에 직면하기보다, 몇몇 대상을 ‘충’으로 묶어내서 문제의 근원으로 지목하는 방식이 더 쉬운 방법이다. 이해가 주는 이익보다 혐오가 주는 이익이 즉각적이다.

“미워하면서 닮는다”란 말이 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나는 ‘이해의 부재’가 그 중 하나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미워하는 대상, 혐오하는 대상에 대해선 그가 왜 그런 선택을 하는지에 대해 이해하지 않게 된다. 무엇이 그를 그 모습으로 만들었는지를 이해하지 못할 때, 나는 유사한 상황에서 스스로를 어떻게 지켜야 할지 모를 수 있는 것이다. 남을 욕하긴 쉽지만, 다른 방식으로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혐오의 말보다는 이해의 말을 더 많이 사용할 필요가 있다. 적어도 내가 분노하고 비판하던 일들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내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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