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술부 최예린 기자

“당신은 페미니스트인가?”는 상당히 곤란한 질문이다. “네”라고 대답하면 자칫 ‘남자의 권리는 우습게 알면서 여자로서의 특권은 있는 대로 누리려는 기 센 여자’나 ‘여자들 비위나 맞춰주면서 남자답지 못한 남자’가 될 수 있다. 그렇다고 또 “아니오”라고 대답하면 ‘교양 있고 깨어있는 현대인으로서 단연 관심을 가져야 할 분야에 무지한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이처럼 페미니스트라는 단어는 여러 맥락에서 완전히 다른 의미로 쓰이고 있다. 그래서 본인이 페미니스트인지 아닌지를 밝히는 것만으로도 금방 갈등이 시작될 수 있을 정도로 이 단어는 논쟁적이고 민감한 말이다.

이쯤 되면 페미니스트의 본래 의미가 무엇인지 헷갈릴 정도지만 국립국어원 사전을 뒤져도 석연찮은 답뿐이다. ‘여권신장 또는 남녀평등을 주장하는 사람’이라는 정의가 남과 여라는 이분법적 성 질서를 답습하며 다양한 종류의 사회적 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은 차치하고라도 ‘여자에게 친절한 남자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는 의미가 성평등주의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페미니즘이라는 말이 소비되지만 정작 페미니스트가 스스로를 밝히긴 민망한 실정이다.

이 같은 우리 사회의 페미니즘 담론의 현주소를 돌아보면 『일탈: 게일 루빈 선집』의 루빈이 펼치는 급진적 논의가 한 발짝 더 멀어지는 기분이 든다. 그럼에도 루빈의 논의가 우리 사회와 다소 먼 지점에 있다는 말이 곧 우리 사회가 그리 도달할 수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루빈의 논의는 한국사회의 페미니즘 담론보다 훨씬 일찍 시작됐고 오랜 기간에 걸쳐 1세대, 2세대, 그리고 3세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섹슈얼리티 담론을 펴왔기 때문에 보다 앞선 곳에 위치하고 있을 뿐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비정상’으로 치부되는 것들이 ‘정상’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진통을, 루빈도 마찬가지로, 아니 어쩌면 더 심하게 겪어왔다.

아직은 너무 많은 것들을 불편해 하는 우리 사회도 이미 비정상에서 정상으로, 불편에서 일상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밟는 중이다. 우리가 이러한 불편을 체감하고 있다는 것은 달리 말해 우리가 어딘가로 나아가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진통이 한 차례 지나간 후에는 우리 스스로 당당하게 밝힐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어떠한 의미에서 페미니스트라고, 혹은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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