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으로 뒤엉킨 세상살이를 ‘베끼는’ 드라마 작가
갈등으로 뒤엉킨 세상살이를 ‘베끼는’ 드라마 작가
  • 권혜빈 기자
  • 승인 2015.10.11 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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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고 싶었습니다] 드라마 작가 하명희

평범한 회사에 다니는 남자와 쉬는 시간에 그를 찾아온 여자. 결혼 준비에 한창인 두 남녀는 회사 건물 뒤뜰에서 모처럼 오붓한 시간을 보낸다. 남들 눈을 피해 입맞춤을 하려는 순간, 남자를 확 밀쳐낸 여자가 말한다. “예단은 어떡해?”

드라마 속 예비부부의 낭만을 처참히 뭉갠 이 장면처럼,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로 인기몰이 중인 드라마 작가 하명희 씨를 만났다. <상류사회> 집필을 끝내 한숨 돌리고 있다는 그는 방송국 근처 한적한 카페에서 기자를 반겨줬다. “사실 내가 기자들을 인터뷰하러 온 거예요”라고 말한 그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기자에게 대학 생활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다. 그의 드라마 속 인물들처럼 짧게 끊기면서 톡톡 튀는 말투를 구사하는 하 작가는 상대방을 대화에 빠져들게 했다.

 

 #1. 주변의 사연을 포착해 글을 쓰다.

 

“시를 써서 상을 많이 탔던 것 같아요.” 어릴 때부터 문학소녀였다는 하 작가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던 중 우연히 드라마 촬영 현장을 마주쳤다. 그는 촬영장의 조명이 배우들을 내리쬐고, 한쪽에서 다른 사람들이 숨죽이고 있는 장면에서 “어떤 운명 같은 걸 느꼈다”고 당시의 감정을 표현했다. 드라마 작가가 되기로 마음먹은 그는 방송작가협회 교육원에 등록해 수업을 받으며 ‘이게 내 길이 맞다’는 확신을 하게 됐다.

“난 경험이 많지도 않고 사건을 만드는 타입이 아니에요”라고 말하는 하 작가는 자신의 경험에 대한 겸손함 때문에 주변 사람들의 사연에 귀 기울이는 사람이다. 신문 한 줄, 책 한 권, 사람들과의 대화 등 모든 것이 그의 글감이 될 수 있다. 하 작가의 작품에선 그가 실제 살아가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을 포착한 흔적이 엿보인다. 1994년 MBC 공모전에 당선돼 전파를 탄 그의 첫 작 <아버지의 자리>는 아는 언니의 가족사에 상상력을 덧대 썼다. 극 중 평생 아들밖에 몰랐던 아버지는 늙어 의지할 데가 없어지자 천대하던 막내딸과 단둘이 살게 된다. 이 드라마는 퇴직 후 홀로 남은 노인의 삶이 갈수록 팍팍해지던 시절 보편적인 인물을 그려 대중의 공감을 얻었다. 그는 “아내들이 남편한테 ‘저 드라마 좀 보고 나한테 잘하라’며 많이들 잔소리를 했다”며 웃었다.

이후 <가장 슬픈 자세> <사랑이 꽃피는 계절> 등을 집필하던 그는 2000년 이후 드라마를 떠나있던 시기에도 사연을 모으며 ‘재밌게 놀았다’. 하 작가는 글감을 정리하고 드라마로 각색할 소설을 쓰는 일상을 보내며 때때로 방송 프로그램 <사랑과 전쟁> 집필에 참여하기도 했다. 실제 부부의 사연을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그는 다른 부부의 속사정 이야기를 얻을 수 있었다. “남들이 볼 때는 이혼이 답인데 고민하면서 그대로 사는 사람들을 이해해보려 했어요. 프로그램이 갈수록 자극적인 것에 치우치기도 했는데 그렇게 안 쓰려 노력했죠.” 통속성 짙은 사연은 이후 미혼인 그가 부부 관계에 관한 밀도 있는 드라마를 만드는 데 재료가 됐다.

▲ 하명희 작가는 '배우의 자연스러운 감정을 뽑아내기 위해' 대본에 구체적인 감정 지문을 적지 않는다. 그는 "배우는 원래 감정이 풍부한 사람이기 대문에 감정 지문은 '감정 오르며'정도로 간단히 적어요"라고 말했다. 배우들 사이에는 '머리 나쁘면 못하는 대본'이라는 농담도 나왔다.

#2. 현실 속 삶과 인간을 드라마로 그리다.

 

하 작가는 지난 3년 동안 미니시리즈 <우리가 결혼할 수 있을까> <따뜻한 말 한마디> <상류사회>를 연이어 쏟아내며 지극히 통속적인 주제로 삶과 인간을 현실감 있게 포착하는 작가로 떠올랐다. 최근 판타지나 액션으로 가득한 드라마들이 보는 눈을 자극하는 와중에 얻은 남다른 평가였다. 그는 드라마가 현실의 사소한 삶까지 놓치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특별함 속엔 따뜻함이 없어요. 별거 아닌 것 같고 작은 것들이 삶이고 진짜죠.”

하 작가의 드라마 속 현실과 닮은 허구의 인물들은 선인이나 악인으로 재단할 수 없는 ‘그냥 인간’일 뿐이다. “나이가 들면서 인간은 여러 가지 것들이 합쳐진 복합체라고 생각하게 됐죠. 겉만 보고 판단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에요.”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만든 그의 드라마에는 페미니스트라고 자신을 이야기하면서 애인에게 호구가 되는 여자, 일찍 남편을 잃고 고생스럽게 생계를 꾸리지만 ‘남자 없이 내 돈으로 자식 키우는 삶이 좋다’고 외치는 과부 등 아이러니한 인물이 가득하다.

하 작가는 서로 다른 인물들이 세상 속에서 얽히고 설키는 것을 지극히 현실적으로 보여준다. <우리가 결혼할 수 있을까>의 예비부부는 상견례부터 예단 마련까지 결혼 준비로 동분서주하며 양가 부모의 기 싸움에 이리저리 치인다. 유부남과 유부녀가 만남을 끝내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따뜻한 말 한마디>는 둘의 외도가 일파만파 퍼져 부부 관계가 돌이킬 수 없게 틀어지는 과정을 담았다. 그는 “많은 사람이 갈등과 충돌이 생기면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니 무조건 헤어져야 하고 결혼은 깨야 한다고 말하는데 그렇지 않다”며 “갈등은 늘 우리의 삶을 따라다니는 것”이라고 생각을 밝혔다. 갈등에 대한 작가의 생각은 인물의 입을 통해 전해지기도 한다.

 

“평화가 무조건 좋은 건 아닌 것 같아요. 갈등이 일어나니까 여러 각도로 생각해보게 돼서 좋은 것 같아요.”

-<우리가 결혼할 수 있을까>

 

하 작가는 복닥대는 세상살이 끝에 인물들이 내뱉는 대사에 삶에 대한 농밀한 의미를 담으려고 노력한다. 자식 결혼으로 골머리를 앓다 손 떼기로 한 인물은 “결혼은 자식만 부모한테 독립하는 게 아녜요. 부모도 자식한테 독립하는 거에요”라고 말한다. 자신의 삶을 망친 상대가 벌을 받지 않는 인생을 겪은 뒤 “인과응보는 랜덤이야. 인생은 그냥 사는 거야”라고 담담하게 읊조리는 인물도 있다. 그가 선보인 대사가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으면서 한 출판 기획자는 그에게 대사를 골라 담은 에세이를 제안하기도 했다.

하명희표 드라마가 나이도 가치관도 제각각인 사람들의 현실적인 모습을 그리기 때문인지 하 작가는 “엄마와 딸이 함께 본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드라마가 사람들의 일상에 더욱 녹아들기 바란다고 전했다. “드라마는 사람들한테 오락일 수도 있고 의미일 수도 있는 것 같아요. 우린 사실 너무 힘든 세상에 살고 있잖아요. 함께 드라마를 보면서 저 드라마 때문에 한 주가 살만하다는 생각이 든다면 된 거라고 봐요.”

 

#3. 세상살이를 견뎌내는 자신을 향한 믿음 

 

하 작가의 드라마에는 갈등을 일으키던 문제가 한순간에 사라지거나 어느 날 힘을 얻은 인물이 장애물을 해치우는 결말은 없다. 우리네 삶 속에서 갈등을 해결하는 것은 극적인 무엇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달린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나를 이해해주지 않고 나와 부딪히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럼 상처를 받고 자기 자신을 잃어가는 사람들이 많아요. 남이 좋아하는 내가 되려고 나를 버리면 더 엉망이 되죠. 관계 속에서 자신을 스스로 지키면서 성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봐요.” 작가의 생각은 <상류사회>에서 비정규직 신분으로 월세방을 전전하지만 착하고 모난 데 없는 지이에게 윤하가 건넨 위로 속에도 담겨있다.

 

“마음은 실력이야. 넌 지금까지 니 인생을 망가뜨리게 할 순간들이 많았어 (…) 취직 못 해 전전하구, 습기 차고 곰팡이 스는 지하방에 살았어도 넌 그러지 않았어. 넌 널 지켰어. 니 마음은 사람들이 말하는 수치로 말하자면 하버드 박사학위 받을 수준이야.”

-<상류사회>

 

하 작가는 언뜻 자신의 처지에 안주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는 인물들을 응원하며, 인물들의 최후를 드라마틱한 반전 없이도 갈등 해결과 성장으로 끝맺도록 한다. 두 번 헤어졌던 예비부부는 서로를 비교하며 생기는 열등감을 지우고 결혼에 골인하는 한편, 벼랑 끝에 서있던 부부는 둘만의 추억과 서로에 대한 연민으로 관계를 봉합한다. ‘가난한 사람들이 계속 가난한 건 가난 속에서 행복을 찾기 때문’이라고 되뇌며 스펙 있는 여자를 찾던 남자는 사랑을 하며 그 생각을 바꾼다.

 

#4. 청춘의 현실 그리는 차기작으로 만나길

 

드라마 <상류사회>는 사회에 계급이 존재하고, 가난하면 행복할 수 없는 세태 속에서 계급이 다른 청춘들의 절뚝거리는 우정과 사랑을 보여줬다. “그럼에도 청춘들이기 때문에 사랑을 선택할 수 있고 합리적인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고 말한 하 작가는 다음 작품에서도 20대의 이야기를 이어가고 싶다고 전했다. “젊다는 건 에너지가 있다는 거에요. 물론 본인들은 인지하지 못하겠지만.” 극을 통해 평범한 것도 재미있을 수 있고, 통속적인 것도 의미 있을 수 있음을 알리는 하명희 작가. 세속적 인물들이 복닥대는 한 폭의 풍속도 같은 이야기에 공감하는 이들은 갈수록 늘어나는 듯하다. 그의 다음 이야기에서는 어떤 청춘들이 세상살이 속에서 단단한 자기 자신을 만들어갈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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