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어렸을 적부터, 언니는 어른이 되면 한국을 떠나버릴 거라고 말하곤 했지? 나는 그 말에 괜히 서러워져서 울었던 기억이 나.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그야말로 때를 앞선 통찰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네. 오늘 여기, 정치에는 논리가 없고, 사람들은 혐오를 함부로 말하지. 얼마 전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우리는 사회의 상식과 예의가 실종됐다고, 사고와 언어가 얄팍해졌다고 통탄했었나. 줄줄이 딸려 나오는 문제들 중 무엇부터 바뀌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탄식했다가, 다시 술을 마셨던가. 언니, 정말로 이곳은 지옥인걸까? 우리가 살아남는 길은 이곳을 벗어나는 것밖엔 없는 건가?

나는 어릴 때처럼 자꾸만 서러워졌고, 이번엔 우는 대신 지옥에 관한 글들을 몇 편 읽었어. 누군가는 지옥에서 살아가는 법을 알고 있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야. 그 중, 며칠 뒤면 아흔 번째 생일을 맞게 될, 저명한 노 사회학자의 전언을 여기 옮길까 해. 그가 쓴 어느 책의 부제가 그 글을 읽게 된 이유였지. 그건 바로 ‘유동하는 세계의 지옥과 유토피아’였어.

▲ 삽화: 이종건 기자 jonggu@snu.kr

여기서 왜 지옥과 유토피아가 나란히 적혔는지 설명하는 건 어렵지 않아. 이런 식이지. 본래 인간은 불행할 때 신을 탓했어. 불행이란 그저 별수 없는 운명이었겠지. 그런데 인간은 점차 신을 해고하고 스스로를 믿기 시작해. 보잘것없는 삶 이후 도래할 구원을 기다리기보단, 자신을 변화시키는 걸 택한 거야. 그리하여 이제 우리는 이렇게 외쳐. 자아를 가꿔라, 자신을 관리하라, 스펙을 쌓아라, 노오-력해라! 내가 내 삶을 창조하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래 언니, 눈치 챘어? 저 사회학자는 근대 초 사람들이 꿈꾼 유토피아가 실은 지옥으로 귀결됐다고 말하고 있어. 실패한 인간은 신 대신 자신을 탓해야 하고, 불가능을 토로하는 것은 무능을 고백하는 것이 됐지. 옛날엔 구원이 고생 끝의 낙원이었지만, 이 위험한 낙원은 삶 그 자체야. 사는 동안 영원한, 끝나지 않는 꿈.

그래서 나는 문득 다른 누군가에게 노력을 재촉하는 것이 무서워져버린 거야. 심지어 함께 남아달라는 것마저. 에이 아냐, 이건 패배주의 같은 게. 글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언니, 함께 갔던 그 집회를 기억해? 우린 차벽으로 둘러싸였고, 밤은 깊었고, 사람도 많지 않았는데, 무엇보다도 정말 추웠잖아. 하나둘 샛길을 열어 사람들이 돌아갈 때, 나는 또 서운하고 서러웠었나? 그건 잘 기억나진 않지만, 누군가의 외침은 지금까지도 계속 생각나. “고생했다, 고맙다, 조심히 가시라, 우리 또 만나자.”

사람들이 빠져나가던 그 추운 광장엔 절망이 있었을까 희망이 있었을까. 나는 그날을 생각하면 늘 기분이 난감해지곤 했지만, 이젠 조금 알 것 같아.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우린 “고생했다, 또 만나자”라며 서로 위로해 살아가는 거지. 떠나도 좋아, 다시 만날 수 있다면. 뛰어가지 않아도 괜찮아, 걷더라도 지치진 말길. 내려놓는 용기를 갖더라도 행복만은 단념하지 말길.

그런 식으로 우울과 무기력, 자조와 위악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게 여느 때보다도 우리에겐 간절해 보여. 사실, 지옥 바깥이란 건 없으니까. 헬조선을 벗어나면 모든 것이 해결될까? 저 노학자의 말처럼 지구화된 이 세계 속 모든 것이 동질적이라면, 우리한테 필요한 건 지옥을 탈출하는 방법이 아니라 지옥을 살아가는 방법이 아닐까? 그래서 그는 책의 끝에서, 그 방법 두 가지를 알려주지. 쉬운 방법은 아예 악마가 되는 것. 싫다면? 다른 방법은 “지옥 한 가운데서 지옥이 아닌 것을 찾아내어 그것을 지속시키는 것.” 그러니까 우리, 희미한 희망을 품은 채로 지옥을 살아보자. 그것이 지옥에서 살아남는, 결국엔 지옥을 진정 벗어나는 방법이길 바라며.

 

백수향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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