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시내 강사(독어독문학과)

요즘 같이 날씨가 추워지기 시작하면 가끔 어린 시절 따뜻한 아랫목에서 이불 속에 들어가 추위와는 사뭇 다른 떨림을 느끼며 보았던 <전설의 고향>이라는 텔레비전 시리즈가 생각나곤 한다. 나는 유독 겁이 많은 편이라 절반은 보고, 또 절반은 기동성 있게 이불로 귀와 눈을 가리면서 <전설의 고향>을 시청하곤 했다. 겁쟁이인 내가 <전설의 고향>에 그렇게 매료되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주인공 귀신들이 처한 모순된 상황의 비극성에 있었던 것 같다. ‘내 다리 내놔라’의 다리 주인이나 ‘아랑’과 같은 한 많은 처녀귀신들은 대개 자신의 억울한 사연을 들어달라고 인간세계에 출몰했지만, 미지의 세계인 죽음의 공간에서 온 이들의 등장은 이 세상에 속한 인간들에게는 공포를 불러일으키니 말이다.

서양의 문학사에서 이러한 초자연적 존재들, 즉 우리가 유령이라고 총칭할 만한 존재들이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대략 계몽의 세기라고 불리는 18세기 즈음이다. 이성과 과학을 신봉하는 계몽주의의 시대정신과 유령이 출몰하는 환상문학이라는 이 모순된 병치에 대해서 프랑스 평론가 로제 카유아는 현실세계에서의 ‘질서에 대한 위반, 균열, 분노’라는 말로 설명한다. 즉, 환상문학은 이성과 과학에 대한 반발이자 이성과 과학으로 인해 억압된 것의 표출이며, 이런 측면에서 역설적이게도 계몽주의는 환상문학이 발생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환상문학은 태생적으로 전복적이고 도발적인 문학으로 간주되며, 대개 환상문학의 주인공들인 초자연적 존재, 유령은 인간세계를 위협하는 위험한 존재이거나 역으로 인간사회로부터 추방당한 타자, 이방인, 경계인의 역할을 도맡게 됐다. ‘드라큘라’ 같은 이야기가 매력적인 소재로서 끊임없이 새롭게 생산되는 이유 중 하나도 여기에 있다. 유령은 인간세계의 질서를 위협하는 동시에 역으로 보면 인간세계의 질서로부터 추방당했으나, 사연을 가진 채 인간세계를 떠나지 못하고 그 주변을 배회하는 양가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200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이자 국내에서는 『피아노 치는 여자』라는 소설로 잘 알려진 오스트리아 작가 엘프리데 옐리네크는 일찍이 문학적 모티브로서의 뱀파이어, 좀비와 같은 유령에 주목해왔다. 작가의 희곡 『알프스에서』(2002)는 낭만적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제목과 달리 ‘전후 오스트리아 최대의’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니는 카푸른 대참사에 관한 작품이다. 2000년 11월 11일 스키 휴양지인 오스트리아 카푸른 지방에서 산악열차 화재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동체의 결함으로 인해 문이 제대로 열리지 않아 대피가 불가능 했다는 점, 화재가 바로 터널 안에서 일어났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스키캠프에 참여하는 청소년들로 인해 평소 보다 탑승자가 많았다는 점 등 복합적인 요인으로 인해 155명이나 되는 사망자를 냈다. 사고 조사에 따르면 열차는 이미 여러 차례 고장을 일으켰고, 특히 사고가 나기 2주 전쯤에는 터널 안에서 갑자기 정지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고 후 기소된 열차 제조회사, 운행사, 교통국 등 관련자 16명 모두 수년간에 걸친 재판을 통해 고의성과 근무태만을 증명할 수 없다는 이유로 최종적으로 무죄판결을 받았다. 155명이나 되는 희생자만 있을 뿐 가해자는 한 명도 없는 이 사건의 형상화를 위해 옐리네크가 취한 문학적 전략은 죽은 이들, 즉 유령을 소환하는 것이었다. 법은 가해자의 죄를 합법적으로 면해주는 역할만 할 뿐 피해자, 희생자의 입장을 대변해 주거나 이들을 위로해 주지 않았다. 살아있는 자들이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사실을 악용하자 문학은 그 현실을 뒤집어 ‘유령이 말을 한다’는 전략으로 현실에 대응했던 것이다.

죽은 이들을 ‘한 번쯤은 문학에서 소생시키고 싶었다’는 옐리네크의 말처럼, 유령을 대면하는 불편함을 거두고 우리 주변의 수많은 유령을 문학적 상상력을 동원해 되살려내 역사도 법도 기억하고 위로해 주지 않은 그들의 사연과 억울함을 경청하고 애도하는 것이 지금 우리에게도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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