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영주 선임연구원

ICT사회정책연구센터

‘학교에서 연구를 진행하시면서 느꼈던 점, 학문적인 소재, 사회적 의견, 학생들에게 하고 싶으신 이야기 등’. 『대학신문』에서 보낸 원고 청탁 메일의 주제들이었다. 이런 자유 주제가 가장 어렵다. 편차가 너무 커서 고민의 범위가 정해지지 않으니 주제가 좁혀지지 않는 탓이다.

이럴 땐 소거법이 그나마 합리적이다. 학교에서 연구를 진행하면서 느꼈던 점. 이건 일기장에 써야 할 얘기인 것 같으니 제외다. 학문적인 소재. 이건 전공 분야 저널에 실어야 할 것이지 『대학신문』에는 지면 낭비에 불과할 것이다. 사회적 의견. 아마도 정치·사회적 쟁점에 대한 의견을 말하는 듯한데, 최근 정치·사회적 쟁점이 너무 많아서 어떤 쟁점을 택할 것인가 정하는 것부터 난관이다. 마지막, 학생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라…. 그나마 가장 지면 성격에 맞는 주제일 것 같긴 한데, 학문적으로도, 교육자로서도 국내 최고의 교수님들이 계신 서울대에서 내가 감히 무슨 얘기를 한단 말인가. 그러니 지금부터 내가 하는 얘기는 학문적으로 뛰어난 학자나 훌륭한 교육 철학을 지닌 교육자로서가 아니라, 그냥 만만한 선배가 꼭 하고 싶은 얘기 정도로 생각해주면 좋겠다.

내가 늘 개강 첫 시간에 던지는 질문이 있다. 신입생들에게는 지금 고3 올라간 후배들한테 해주고 싶은 말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재수강하는 3학년 혹은 4학년생에게는 올해 입학한 신입생들에게 무슨 말을 해주고 싶은가 묻는다. 그러면 신입생들은 십중팔구 고3들에게 정말 죽도록 열심히 공부하라고 말해주고 싶다고 하고, 3, 4학년 학생들은 십중팔구 신입생들에게 후회 없이 놀라는 말을 해주고 싶다고 답한다. 이 말을 하는 학생들의 표정에는 그렇게 하지 못한 데 대한 후회와 ‘내가 겪어봐서 아는데 진짜 내 말 안 들으면 후회한다’는 믿음이 교차한다. 이미 지나온 시간들에 대한 얘기는 절절하다. 내가 경험해 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만한 선배가 이 란을 빌어 하고 싶은 이야기는 ‘놀아라’라는 것이다. 학생들은 ‘논다’는 것에 왠지 그러면 안될 것 같은 죄책감을 느끼고, 놀면 안된다는 강박을 갖는가 하면 놀 시간이 없다고 자조한다. 그리고 ‘놀라’는 말을 하는 선배가 요즘 청년세대들의 팍팍한 일상을 모르거나 무책임하다고 비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놀아야 한다. 전공과 토익책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분야의 책을 읽는 일(인터넷이나 페이스북을 보는 것이 아니다), 내가 겪어보지 못한 세상과 감정을 대리경험(대리만족과 다르다) 하게 해주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일, 매일 오가는 집과 학교, 아르바이트 동선을 벗어나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그곳이 굳이 유럽일 필요는 없다)을 가보는 일, 나와 다른 환경에서 자란 동기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일, 이 모든 것이 다 노는 일이다.

지면 한계상 더 많은 예를 들 수 없으나, 잘 논다는 것은 한 마디로 많이 읽고 많이 보고 많이 듣고 많이 느끼는 것이다. 놀면서 경험한 감정들, 기쁨, 감동, 슬픔, 노여움, 희망, 자신감, 실망, 좌절감, 그리움과 애틋함, 미움과 배신감, 이 모든 감정 경험과 그 감정에 대처한 방식이 그대들을 만든다. 수많은 감정의 결들을 겪으며 만들어진 사람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헤쳐나가야 하는지 안다. 이미 그와 비슷한 상황을 경험해 봤기 때문이다. 무수한 감정을 겪어본 사람은 다른 사람의 기쁨과 슬픔과 희망과 노여움을 더 잘 공감할 수 있다. 그와 유사한 경험을 해봤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타인을 함부로 대하면 안된다는 것을 안다. 거기서부터 배려가 시작되고, 우리가 함께 잘 사는 방법을 고민하는 일이 시작된다.

논다는 것은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감정들을 섭렵하는 일이다. 놀면서 알게 된 자신의 특성, 놀면서 깊어진 사람에 대한 이해가 나를 단단히 만들어준다. 그러니, 그대, 놀아도 될까 고민하지 말고 무얼 하고 놀까 고민하시라. 그리고 제발 후회 없이 잘 노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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