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만화 보니? 난 그래픽노블 읽는다
아직도 만화 보니? 난 그래픽노블 읽는다
  • 조수지 기자
  • 승인 2016.03.20 05: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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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소설적 깊이를 추구하는 만화, 그래픽노블

“만화 좀 그만 봐!” 어린 시절 엄마의 잔소리를 피해 이불 속에서 만화책을 몰래 펼쳐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화가 소모적인 놀거리로 여겨지던 시절도 이젠 옛말이다. 작가의 예술혼이 살아있는 그림체와 소설을 읽는 듯 깊이 있는 서사. ‘그래픽노블’이라는 이름을 달고 서점의 한 코너를 차지한 작품들이 만화 장르의 저변을 넓혀가고 있다.

 

만화를 우습게 보지 마라

그래픽노블은 진지함과 깊이를 추구하는 만화다. 이는 만화가들이 만화를 가볍게 여기는 대중의 인식에 대항해 차별성을 두고자 작가주의와 만화의 예술성을 내세우면서 탄생했다. 만화가 ‘코믹 스트립’(comic strip)이라 불리며 어린애나 보는 유치한 슈퍼히어로물로 인식되던 시절, 미국 만화가 윌 아이스너는 사색적인 주제와 예술적 그림을 내세운 작품 『신과의 접촉』(1978년)을 출간하면서 ‘그래픽노블’이라는 장르를 처음 선보였다. 일본에서도 50년대부터 이어진 작가주의 열풍인 ‘극화운동’이 활발해졌고 유럽에선 일찍이 만화가 ‘제9의 예술’로 불리며 인정받아왔다. ‘그림으로 이뤄진 소설’을 뜻하는 그래픽노블 장르는 이런 흐름에서 나온 만화들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자리 잡았다.

그래픽노블이라는 말이 나오기 이전에 과거 한국 만화계에서도 작품성 있는 만화를 그리는 작가주의 움직임이 나타났다. 1985년 잡지 「월간 만화광장」이 등장해 당시 주류였던 소년·명랑만화도 성인용 에로만화도 아닌 성인 독자를 위한 진지한 만화 ‘성인극화’를 내세웠다. 특히 허영만이 연재한 ‘청춘극화 스토오리-담배 한 개비’는 80년대를 관통하는 우울한 정서를 사실적으로 그렸다는 평을 받았다.

한편 90년대 후반엔 유럽 만화 거장들의 작품이 수입되면서 그래픽노블이라는 개념도 받아들여졌다. 이후 그래픽노블은 ‘성인을 위한 만화’ ‘소설과 만화의 중간 장르’ 등으로 불리면서 마니아층을 형성해나갔다. 현재 국내에서도 한국의 전쟁사를 사실적으로 그린 『남한산성』의 권가야 작가와 LGBT 담론을 녹여낸 『환절기』의 이동은·정이용 작가를 비롯한 많은 작가가 그래픽노블 작가로 불린다.

 

창작부터 번역까지 한땀 한땀

작가주의를 표방한 그래픽노블에선 만화가의 개성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림체만 봐도 작가가 누구인지 알 수 있고 배경색, 글씨체, 말풍선 등 만화 장치가 실험적인 방식으로 활용된다. 그림에 자막처럼 대사를 줄줄이 달아놓은 작품(『잉칼』)이 있는가 하면 인물마다 대사에 각기 다른 글씨체를 사용한 작품(『아스테리오스 폴립』)도 있다. 김한민 작가의 『혜성을 닮은 방』에선 대사가 컷 선 밖으로 튀어나와 기억과 현실을 넘나드는 이야기 전개와 연관된다. 김한민 작가는 “이야기에 알맞은 목소리와 스타일을 찾는 것을 가장 염두에 둔다”며 “한 가지 스타일을 개발해 고정시킨 후 이를 공장처럼 반복해서 찍어내는 대신, 하고픈 이야기에 맞춰 새로 모든 걸 고안한다”고 자신의 작품관을 밝혔다.

외국 작품이 많은 그래픽노블의 특성상 작가의 개성과 이야기의 깊이를 고스란히 전달하기 위해선 일반 만화와 다른 번역작업이 필요하다. 현재 그래픽노블의 번역·출간은 대형 출판사보다는 소규모 전문 출판사들이 맡는 경우가 많고 그래픽노블만을 맡는 번역가 프로젝트팀도 생겼다. 해바라기 프로젝트 이하규 팀장은 “『기후변화의 모든 것』의 시니컬한 마지막 부분을 최대한 재수 없게 표현하기 위해 거울 앞에서 냉소를 머금고 몇 번이나 읽으며 마음에 드는 단어와 표현을 찾았다”고 번역 과정을 말했다.

▲ 『폴리나』의 한 장면. 주인공의 발레 동작과 스승의 가르치는 손길이 섬세하게 표현됐다.

오늘 저녁, 묵직한 만화책 한 권?

그래픽노블은 빠르게 훑어내려가며 읽을 수 있는 기존의 만화들과는 다른 매력이 있다. 이 팀장은 “아트 슈피겔만의 『쥐』를 처음 봤을 때 일본 만화와 다른 전개와 익숙하지 않은 그림체에 짜증이 났지만 십여 분 후에는 완전히 매료됐다”고 처음 그래픽노블을 접했을 당시를 회상했다. 이슬람 세계에서 발생한 두 노예의 사랑 이야기 『하비비』를 특히 좋아한다는 독자 김혜영 씨(21)는 “인내심을 가지고 천천히 페이지를 넘겨보면 묵직한 이야기가 머릿속에 펼쳐진다”고 말했다.

최근 그래픽노블의 인기는 국내 만화 소비 지형도를 조금씩 바꾸고 있다. 아직 대중은 만화하면 웹툰이나 만화방에서 빌려보는 기존 만화책을 떠올리긴 하지만, 일부 마니아층 독자들이 그래픽노블 단행본을 적극적으로 구매하기 시작한 것이다. 김혜영 씨는 “독특한 그림체 덕분에 책꽂이에 ‘전시’해놓으면 그 자체로 예술품이 된다”고 말했다. 수요가 늘자 몇몇 대형서점에선 그래픽노블 코너가 신설됐고 그래픽노블을 포함한 그림책 전문 동네책방들과 전문잡지 「월간 그래픽노블」이 등장했다.

그래픽노블 장르 안에서도 변화하는 취향을 짚어볼 수 있다. 이전까지 역사·정치 분쟁 등 사회적 문제를 파헤치는 작품이 인기를 얻었다면 요즘은 사랑, 청춘 등 문학적 서사를 녹여낸 ‘리터러리 그래픽 노블’(literary graphic novel)이 주목받고 있다. 『폴리나』로 유명한 프랑스의 바스티앙 비베스는 인물의 작은 움직임과 시선 하나하나를 긴 호흡으로 그려내 사랑의 감정을 표현한다. 소소한 일상을 주로 옴니버스 형식으로 그리는 작가 다니구치 지로의 『산책』에선 주인공이 매일 산책을 하면서 느끼는 감각이 그려진다. 성상민 만화평론가는 “감수성이 강한 사람들, 섬세하고 감성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그래픽노블을 비롯한 새로운 독립출판물 시장에서 주도적으로 이를 소비하고 있다”고 독자들의 성향을 분석했다.

다양한 그래픽노블의 인기는 한국 만화의 저변이 넓어지고 있음을 알리는 징표다. 김낙호 평론가는 “하루아침에 혁명적으로 변화한 것이 아니라 15년에 걸쳐 차근차근 노력한 결과 다양한 만화의 하위 장르를 인정하고 수용하게 된 것”이라고 그래픽노블의 등장이 가져온 만화 장르의 변화를 이야기했다. 현재 국내에서 그래픽노블은 마니아층을 중심으로 소비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래픽노블이라는 이름을 몰라도 소설과 같은 묵직한 만화책을 만나본 이들은 점차 많아지고 있다. 그래픽 노블이 한국 만화의 주요한 한 자리를 차지할 날이 멀지 않은 듯 하다.

 

사진제공: 미메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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