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queer) 책을 따라가 만난 언덕 위 책방
이상한(queer) 책을 따라가 만난 언덕 위 책방
  • 조수지 기자
  • 승인 2016.03.27 01: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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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개성 넘치는 동네책방 - ③ 햇빛서점

인쇄매체의 종말이 점쳐지기도 하는 요즘, 동네마다 자리 잡은 작은 책방의 등장이 예사롭지 않다. 동네책방, 독립서점으로 불리는 이들은 대형서점에서 찾아볼 수 없는 유별난 주제의 책이나 물량이 적어 쉽게 구할 수 없는 독립출판물을 구비해 손님을 끈다. 이번 연재 기획은 저마다의 개성과 철학을 간직한 서점들을 찾아가 그곳에 모여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한다.

① 일단멈춤 ② 스토리지북앤필름 ③ 햇빛서점 ④ 상상하는삐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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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성소수자 인권 운동은 주로 무지갯빛 깃발이 나부끼는 축제 같은 문화 운동의 방식으로 이뤄져 왔다. 성소수자들이 스스로의 목소리를 당당하게 표출하려는 욕구가 커진 최근엔 퀴어 문화 운동이 활기를 더해가는 한편 무지갯빛으로 환한 문화공간도 생겨나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국내 최초이자 유일의 퀴어 서점인 ‘햇빛서점’이 탄생해 주목받고 있다.

 

당당하게 깃발 내건 퀴어책방

2년 전 자신의 성적 지향을 깨달았다는 햇빛서점 사장 박철희 씨(28)는 성소수자 커플이 낮에 남들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머물 수 있는 곳이 적다고 느꼈다. 이에 직접 그들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기로 했다. 박 씨는 “어떤 공간을 만들까 고심한 끝에 서점을 만들기로 했다”며 “방문객이 사물화된 무언가를 들고 집에 돌아간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고 서점을 구상한 이유를 밝혔다. 지난해 4월 그는 ‘게이의 메카’로 불리는 이태원이나 종로에서 장소를 물색한 끝에 이태원 언덕배기에 작달막한 공간을 마련했다. 책방의 이름은 햇빛 쬐는 날에 즐기는 퀴어 문화 공간이라는 의미로 ‘햇빛서점’이라고 붙였다.

이후 박 씨는 구하기 쉽지 않은 퀴어 콘텐츠를 모으기 시작했다. 국내엔 유통되는 콘텐츠가 많지 않아 해외 사이트에서 주문하거나 해외 창작자에게 이메일을 보내 자료를 요청했다. 일본에서 직접 자료를 수집해오느라 개점을 늦추기도 했다. 차곡차곡 콘텐츠를 모은 지 5개월이 지난 지난해 9월 4일, 국내 최초로 문을 연 퀴어 서점이 간판 위에 무지갯빛 깃발을 내걸 수 있게 됐다.

6평짜리 서점은 건장한 성인 남자 다섯만 들어가도 꽉 찰 정도로 좁지만 나름 아늑한 분위기가 있다. 노란 알전구의 불빛이 원목 가구를 비추는 이 공간에서 방문객은 단행본, 화보, 포스터 등 다양한 퀴어 콘텐츠를 한눈에 구경할 수 있으며 무지개 팔찌 같은 성소수자 인권활동 후원 굿즈(goods)도 살 수 있다. 박 씨는 “사실 지금은 햇빛이 별로 안 들지만 되는대로 부지를 넓혀 ‘진짜 햇빛’을 받는 공간으로 만들 것”이라며 웃었다.

현재 햇빛서점은 주인의 바람대로 성소수자들이 당당하게 머물 수 있는 공간이 됐다. 햇빛서점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던 손님 전광훈 씨(26)는 “LGBT를 위한 오프라인 공간이 부족했었기 때문에 다들 햇빛서점을 좋아하는 분위기”라며 “사진을 전공하고 있는데 나도 나중에 이런 퀴어 문화 공간을 만들고 싶어 들렀다”고 말했다. 박 씨는 “언젠가는 나이 지긋한 게이 커플이 와서 이제는 이런 공간도 다 생겼다며 반가워했는데 그때 가슴이 따뜻해지더라”고 후일담을 전했다.

 

▲ 추운 날씨에도 따뜻한 분위기를 풍기는 서점 안에 무지갯빛 책과 소품이 진열돼 있다.

무지갯빛 콘텐츠가 쌓이는 책장

햇빛서점은 어느 곳보다 발 빠르게 퀴어 콘텐츠를 모으고 있기 때문에 그 서가의 변천사를 보면 국내 퀴어 콘텐츠의 흐름을 가늠할 수 있다. 개점 당시 책장엔 수입 콘텐츠가 대부분이었다. 국내에도 「버디」와 같은 퀴어 생활정보지가 있었지만 몇몇 사람들 사이에서만 유통되다가 폐간되는 경우가 많아 국내 퀴어 콘텐츠가 드물었던 것이다.

최근 햇빛서점의 책장은 괄목할 만큼 다채로워졌다. 이는 성소수자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국내 퀴어 콘텐츠의 생산과 수요가 늘었음을 드러낸다. 한국 게이가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을 담은 매거진 「뒤로」와 ‘한국에서 LGBT로 산다는 것’을 주제로 한 『여섯 빛깔 무지개』가 대표적인 국내 출판물이다. 특히 박 씨는 지난해부터 성소수자 동화책을 만드는 창작집단 ‘이야기채집단’의 『꽁치의 옷장엔 치마만 100개』를 소개하며 “어린 성소수자가 겪을 혼란을 그려낸 이 그림책은 비슷하게 혼란을 겪을 청소년들, 그리고 그런 혼란의 시기를 거쳤을 성인들에게 위로를 건넨다”고 그 매력을 말했다.

햇빛서점의 등장은 이제껏 커뮤니티 안에서만 소비되다 금세 사라지던 국내 퀴어 콘텐츠가 지속적으로 유통될 가능성을 보여준다. 6일(일) 열린 제8회 LGBTI 인권포럼 퀴어 콘텐츠 토론회에서 이야기채집단 송지은 공동대표는 “그림책 출간 후 운명적으로 햇빛서점이 오픈한 덕에 책이 지속적으로 독자들을 만날 수 있게 됐다”고 이야기했다. 한국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회 우야 씨는 “2015년 들어 퀴어 창작자가 자신의 욕구를 드러내 콘텐츠를 만들고자 하는 움직임이 커졌는데 햇빛서점이 이런 콘텐츠가 소비될 기회를 마련해주면서 이어서 또 다른 퀴어 콘텐츠가 만들어질 기회를 줬다”며 “퀴어 콘텐츠의 지속 가능성은 평등한 세상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이 될지도 모른다”고 평했다.

햇빛서점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다. 성소수자 간의 소통뿐 아니라 성소수자와 이성애자의 소통 역시 중시하는 주인은 “게이를 위한 공간으로 출발했지만 누구나 방문할 수 있는 공간이 됐으면 한다”고 다양한 독자를 고려해 책을 고르는 이유를 말했다. 예컨대 『여섯』은 게이와 그들의 이성애자 친구들이 대화하며 서로 이해하는 과정을 담은 단행본이고 「퀴어인문잡지 삐라」는 객관적인 시각에서 퀴어 담론의 맥을 공부할 수 있는 학술지다.

 

나는 자랑스러운 퀴어다

▲ 당당함을 내세운 햇빛서점의 간판에 불이 켜졌다.

책방 주인 박 씨는 퀴어 문화운동에도 참여했다. 지난해 한국퀴어문화축제에 햇빛서점 부스를 마련하고 참가자들에게 나눠준 부채는 성적 묘사로 인해 당시 ‘저속하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에 박 씨는 “험악한 여론을 보고 당황했다”면서도 “하지만 모두에게 인정받을 수 있고 받아들여질 수 있는 ‘온건한’ 것만을 밖으로 두르는 것은 정체성을 속이는 것이며 그럴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포비아가 보기 좋은 퀴어퍼레이드’가 될 필요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책방 안의 근육질 화보 사진과 파격적인 그림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큼직한 쇼윈도에서도 드러난다.

이러한 박 씨의 가치관을 바탕으로 햇빛서점 안에서도 책을 파는 것 이상의 다양한 활동이 진행될 예정이다. 우선 자체적으로 퀴어퍼레이드 복장 제작 워크샵을 준비 중이며, 서점과 공간을 나눠 쓰는 디자인스튜디오 ‘햇빛스튜디오’와 함께 성소수자 커플의 결혼사진도 찍어줄 계획이다. 나아가 서점에서 성소수자를 포괄하는 성교육 수업을 열고 싶다는 포부도 갖고 있다.

“퀴어들이 당당하게 옷장을 벗어나면 좋겠어요. 제가 그랬듯이 말이죠. 누구나 한번뿐인 자기 인생 즐겨야죠.” 국내 유일의 퀴어 전문 서점으로서 ‘당당함’을 내세운 햇빛서점. 본인과 비슷한 사람들이 놀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는 소박한 꿈에서 출발한 이 서점은 퀴어문화공간의 미래를 그리고 있다. 

 

사진: 유승의 기자 july2207s@snu.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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