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기고 싶다. 당신을 웃기고 싶다는 것이 요즘 내 지상 목표다. 목표란 것은 자고로 ‘안 되니까’ 목표인 법인데, 세상에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감정의 옆구리를 콕 건드리는 유형의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어서, 나는 그들의 유머를 보고 엄청난 부러움과 질투에 사로잡혀 있는 참이다. 근래 아껴 읽고 있는 금 모 서평가의 글이 꼭 그러하다. 성실한 독서와 낙낙한 사유 사이로 배꼽 잡는 문장들이 비집어 들어간 형국. 나는 그 웃긴 문장들에 열심히 밑줄을 치고 나름의 분석을 적어보다가, 순간 “내가 진짜 안 웃긴 사람이구나!”를 깨달았지만, 결국 또 ‘진지하게’ 웃음에 대한 이론서를 찾아 읽을 수밖에 없다. 유머도 연애도 글로 배울 수가 없다는데, 어쩌나, 배운 도둑질이 이것뿐이니.

자, 우리는 왜 웃는가? 각종 메커니즘 및 성격에 따라 분류되는 웃음의 유형들은 아주 다양한데 (영화사가 유레네프는 자그마치 38가지의 웃음 목록을 열거했다!) 여기서는 가장 오래고 유명한 웃음의 한 갈래를 이야기해보기로 하자. 플라톤의 적자(嫡子)인 일군의 사람들은 웃음이 타인의 ‘결여’에 관계한다고 여겼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저 원인에 ‘소박하고 무해할 것’이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어쨌든 이 웃음은 타인 앞에 선 자신의 우월함을 기꺼워하는, 어찌 보면 참 얄미운 웃음이 아닌가. 그러나 이런 식의 웃음도 언제나 악의에 찬 것만은 아니어서, 개개인의 개성과 서로 간의 사교성을 중시했던 후대 사람들은 “우정 어린 희화화”로부터 호의와 애정을 구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때 웃음은 아마, 함께 웃는 행위를 통해 서로를 한데 묶는 움직임, 나아가 자타의 결여 그 자체를 긍정적인 것으로 치환하려는 순박한 시도였겠다.

▲ 삽화: 이은희 기자 amon0726@snu.kr

그런데 혹시 지금 당신은 이 글을 어째선가 의심스럽게 보고 있진 않은지. 자만어린 조소야 더 말할 것도 없겠지만, 설령 선의의 웃음일지라도 “당장의 우리에게 웃는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일까?”하고 말이다. 오늘날 어떤 이들의 결핍이란 도저히 긍정할 수 없을 정도의 것이어서, 이제 웃음은 심지어 비윤리적인 것이 된 것만 같다. 도대체, 이렇게나 팍팍한 삶을 앞에 두고 웃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색하고 공허한 눈 가리기가 아닌가. 내가 처진 어깨의 누군가를 웃겨 위로하고 싶다 생각했을 때, 나는 자칫 무심하고 무책임한 낙관주의로 빠지려던 것은 아니었던가.

이때, 나는 마침맞게도 ‘지금 우리가 웃을 수 있다면 이런 것이겠구나’ 싶은 웃음을 하나 발견했다. 러시아 민속학자이며 웃음 연구의 권위자인 블라지미르 쁘로쁘는 오랜 신화와 민담을 분석하면서, 그곳에는 결여와는 관계없는, 오직 삶의 생명력과 관계 맺는 웃음이 있음을 설명한다. 가령 다수의 옛 이야기들에서, 망자의 세계로 들어가려는 산 자는 절대 웃어서는 안 되는데, 웃는 순간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들켜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웃음과 삶을 나란히 두는 이러한 모티브는 그리스 신화에서 더욱 능동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딸을 잃은 데메테르 여신이 웃지 않자 세상의 온갖 곡물들은 성장을 멈췄다. 안타까운 마음에 시녀 이암베가 익살을 부려 여신을 웃기자 일순간 땅에는 봄이 돌아온다. 여신의 웃음이 대지에 생명력을 가져온 것이다. 어쩌면 이 두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단정한 문장으로 바뀔 수도 있을 것 같다. 웃음은 살아있음의 상징이며, 또한 웃음은 삶을 살게 하는 힘을 주는 것이라고.

삶을 위한 웃음. 결국 나는 ‘웃을 수 없는 시대에 웃는 것’에 대해 이렇게 변호하고 있는 셈이다. 삶마저 사유마저 울음마저 지쳐버린 이곳에서, 우리에겐 살아가는 힘을 얻기 위해 가까스로나마 웃는 게 필요할 것이라고. 우리, 기어이 웃음을 지어보자. 그리하여, 더 잘 사랑하고 더 오래 함께하며 더 깊이 울 수 있는 그런 웃음을.

 

백수향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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