댄서 제이는 블랙&핑크를 입는다
댄서 제이는 블랙&핑크를 입는다
  • 조수지 기자
  • 승인 2016.05.01 06: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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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고 싶었습니다] 스트리트 댄서 조진수 씨

뮤지컬 ‘헤드윅’에서나 볼 법한 진한 화장, 하이힐을 신은 채 고양이처럼 가볍게 내딛는 스텝. 부드러운 움직임과 내민 손끝의 선이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는다. 음악이 바뀌자 하이힐을 차서 벗어버린 댄서는 폭발하는 듯 힘 있는 동작과 절도 있는 진동을 만들어낸다.

한 무대에서 여성과 남성을 자유로이 오가는 댄서 조진수를 화양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검은 라이더 재킷을 입고 레게머리를 길게 땋은 모습이 강한 인상을 주는 그가 나긋나긋한 말씨로 기자에게 인사를 건넸다.

소년, 본능을 좇아 춤꾼이 되다

그는 어릴 적 춤을 좋아하던 아버지와 함께 춤추던 기억을 회상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집에서 전축 틀어놓고 춤추던 기억이 아직도 나요.” 취미로 춤을 즐기면서도 튀지 않는 학생이었던 조 씨는 보는 눈이 없는 곳에서 가수들의 무대 안무를 따라 추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남들에게 춤을 보여줄 일이 생겼다. “고등학교 때 화장실에서 연습하고 있는데, 소위 논다는 친구들이 수학여행 장기자랑을 같이 해보자는 거예요.” 친구들의 환호에 희열을 느낀 조 씨는 이후 무대를 갈망하게 됐다.

처음부터 댄서를 진로로 택하진 않았지만, 청년 조진수에겐 춤이 일상이었다. “(군대에서) 병장 되고선 일과가 끝나면 춤을 췄어요. 제대하면 춤을 업으로 삼아야겠다고 결심했죠.” 특히 스트리트 댄스, 그중에서도 힙합 댄스에 매료된 그는 팀 ‘쓰리디 칼라’(이후 ‘큐브 사운드’)에 합류했고 스트리트 댄서 사이에선 다소 늦은 24살의 나이에 무명 댄서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댄스강사 아르바이트를 하던 학원에 ‘경비원’처럼 상주하며 춤을 췄다. “어떻게 그러고 살았는지, 진짜 춤에 미쳐있었죠. 춤추면서 평생 거지로 살아도 좋을 것 같았어요.” 단돈 3만원으로 버텨내야 했던 달이 허다했을 정도로 가난했지만 춤 하나만으로도 행복했던 4년간의 무명 시절이었다.

춤에 미쳤던 일을 덤덤하게 이야기하던 그는 현재 춤은 자신에게 ‘본능’이라고 말했다. “음악과 나 자신에 집중해서 춤추는 행위 자체가 내게 본능과도 같아요.” 조 씨는 2009년 국내 춤꾼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댄스배틀 ‘포다넥스트레벨’에서 준우승을 하면서 무명 시절을 끝냈다. 이후 팀원들과 공연을 하고 이름을 알리며 ‘한 방에 터진’ 그는 해외 대회에서도 여러 차례 1등을 거머쥐었다. 34살인 현재 그는 블랙&핑크라는 자신만의 독보적인 스타일을 완성한 한국 최고의 스트리트 댄서다. 화려한 경력과 수식어에도 그는 “사람들이 던지는 ‘멋있다’는 말 한마디에서 오는 희열감이 계속 나를 춤추게 한다”고 댄서의 길을 이어가는 이유를 단순하게 말했다.

 

블랙, 틀을 깨부수고 나온 '미치광이'

조진수 씨는 자신을한정하고 명명하려는 그 어떤 틀도 깨나가는 댄서다. 그에겐 평소의 그 자신에 더해 제이블랙과 제이핑크까지 세 개의 자아, 세 개의 얼굴이 있다. 첫 번째 자아 제이블랙에는 힙합 댄서라는 설명이 붙지만 그에게 제이블랙은 힙합 댄서가 아니다. “굳이 장르를 빗대 설명하면 힙합이 베이스인 상태에서 프리스타일 댄스를 추구하는데, 대중이 이해하기 쉽게 힙합이라는 말을 가져온 것뿐이에요. 사실상 그냥 저만의, 제이블랙 스타일.” 실제로 빠르고 절제된 움직임이 스톱모션처럼 이어지는 블랙 스타일은 그에게서만 볼 수 있다.

지금의 블랙이 탄생하기 전, 처음 댄스배틀에 나갔을 무렵엔 좋은 평을 받진 못했다는 그는 오기가 생겨 정해진 안무 없이 무대 위에서 ‘미친 사람처럼’ 춤을 추게 됐다고 한다. 그제야 좋은 반응을 얻었다는 조 씨는 “내가 추고 싶은 춤을 솔직하게 춰야겠다고 생각했다”며 “(관객) 반응이 좋으면 그 무대에서의 감정을 정리하고 이를 바탕으로 다시 안무를 짜는 식으로 나아갔다”고 말했다. 그렇게 태어난 것이 ‘광인(狂人)’ 제이블랙이다.

‘춤에 미친’ 제이블랙은 광인의 이미지를 투영시켜 판타지 속의 비현실적인 무언가가 되기도 한다. 그는 “춤의 세계에서만큼은 변신로봇이라든지 용 같은 것이 될 수 있다”며 “스스로 마치 실재하지 않는 그 대상이 된 것처럼 몰입해 춤을 춘다”고 말했다. TV 예능프로그램 ‘댄싱나인’에선 좀비 춤을 선보였다. 그는 “‘와 저런 춤도 있네, 미쳤다’는 반응을 보여주셔서 정말 행복했다”고 말하며 웃었다.

 

핑크, 내 안의 모든 나를 긍정하기

제이핑크는 남성성과 여성성을 가르는 틀마저 깨부수는 조진수의 또 다른 자아다. 핑크 스타일은 남성인 자신의 내면에도 분명 여성성이 존재한다는 조진수의 생각에서 나왔다. 그는 “어떤 남자든 남성성과 여성성을 갖고 있는데 사회에서 ‘남자니까 남자답게 행동해’라고 교육받다 보니 여성성을 없애려 하는 것”이라며 “있는 걸 감추지 말자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자기 내면의 여성성에 몰입하는 것이기 때문에 제이핑크는 여자를 흉내 내는 것이 아니다. “블랙의 춤 따로, 핑크의 춤 따로 이렇게 춤의 스타일을 가른 것이 아니에요. ‘난 지금은 핑크다, 지금은 블랙이다’하고 각각 (몰입하다 보니) 자연스레 춤이 다르게 나오게 됐죠.” 무대에서 내려와서도 화장을 지우기 전까지 제이핑크의 몸짓을 했을 정도로 그는 온전한 ‘몰입’을 한다.

제이핑크는 어떻게 탄생했을까. 한국에서 흔히 걸리쉬 댄스(girlish dance)라고 불리지만 그가 ‘존테 스타일’이라 고쳐 말한 이 춤은 기존에 여성만 추던 안무를 남성 댄서가 하이힐을 신고 표현해내는 것이다. 안무가 존테의 동영상을 보고 ‘처음엔 웃었다’는 그는 곧 춤에 매료돼 그 춤을 따라 추기 시작했지만, 처음엔 그도 남들에게 보이는 것을 주저했다. “컨셉이 그렇다 보니 사람들에게 섣불리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은 불안해서 욕먹을까 봐 못했죠.” 그러던 조 씨가 아내와 지인들의 응원에 용기를 얻어 무대에서도 이를 선보이게 됐고 제이핑크가 탄생했다. 이후 그는 자신만의 ‘핑크 스타일’을 만들어갔다. 더 온전한 몰입을 위해 스트리트 댄서인 아내 마리의 도움으로 자신의 얼굴에 맞는 화장법을 연구했고 보정속옷도 사용해봤다. “(분장을) 해보고 나서야 깨달았어요. 내가 이렇게 해야지 100% 몰입할 수 있겠구나.”

제이핑크는 자신을 향한 시선을 어떠하든 당당하다. ‘더럽다’고 욕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그는 “여성성과 남성성을 오가는 춤은 아무나 못 춘다”며 “오히려 자랑거리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조 씨는 자신을 게이로 오해하길 바라기도 한다. “게이 친구들이 ‘이 언니 아내도 있다’고 하면 말도 안 돼, 거짓말하지 말라고 (한다더라고요). 그런 얘기를 들으면 기분이 좋죠.” 현재 ‘핑크 스타일’을 따라 추는 남성 댄서가 한국에서도 늘어나고 있다. 제이핑크가 이끄는 남자 둘, 여자 셋으로 구성된 혼성 그룹 ‘핑키칙스’는 그중에서도 단연 독보적이다.

 

행복한 댄서, 조진수 스타일

‘조진수’는 블랙과 핑크 모두를 아우르며 이를 넘어서는 매력을 가진 댄서의 이름일 것이다. 춤추게 된 것을 한순간도 후회한 적 없다는 그는 “(춤추는 것의) 의미를 그럴듯하게 지어내 포장하고 싶진 않다”며 “그냥 춤추는 것 자체가 너무 즐겁고 행복하다”고 말했다. 조진수 씨의 꿈은 마이클 잭슨처럼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아티스트가 되는 것이다. 인터뷰가 끝난 후에도 조 씨는 학생들과 춤 연습을 해야 한다며 웃는 얼굴로 기자를 보냈다. 앞으로 그는 어떤 ‘조진수 스타일’로 관객들에게 잊히지 않는 짜릿함을 선사할까.

 

사진제공: 조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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