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분업의 사회과학
탈분업의 사회과학
  • 대학신문
  • 승인 2016.05.22 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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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삼 년간 사회대에 초빙교수로 와있으면서 뜻깊은 시간을 보냈다. 정든 학생들, 나름 익숙해진 16동 주변, 그리고 숙소가 있는 낙성대 인근 길들과 작별할 시간이 가까워졌다. 무엇보다도 여러 학생들과 가진 많은 대화들, 그들이 애써 준비한 때로는 놀라운 내용의 쪽글을 읽을 때의 즐거움과 감동을 기억할 것이다. 이렇게 소중한 기회를 가능하게 해준 대학에 작은 감사의 표시로 이 글을 쓴다. 내용은 처음 관악에 도착했을 때부터 줄곧 관심을 둬왔던 사회과학 지식의 분업과 탈분업에 관한 것이다.

올 봄학기 ‘글로벌 냉전의 이해’라는 이름의 강좌를 어렵게 열었다. 외교학 전공인 정치외교학부 신욱희 선생님과 인류학 전공인 나, 그리고 멀리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온 크리스토퍼 리 교수를 위시한 유럽, 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를 전공하는 여러 국내외 역사학자들이 참여해 공동으로 진행한 냉전의 다양성과 통합성을 다루는 강좌였다.

이 강좌에서 다룬 다양성은 반드시 글로벌 냉전의 지역적 다양함만이 아니었다. 서양사를 전공하시는 분들이 동양사와 한국사를 전공하시는 분들과 강의에 참여한 학생들을 통해 만나고, 또 이들 역사학자들이 강의를 주관한 사회과학자들과 같은 방식으로 만났다. 참여한 사회과학 전공자들은 동북아시아를 큰 틀에서 접근하는 국제관계학 전공자와 베트남전쟁을 미시적으로 접근하는 사회인류학 전공자가 각자의 영역을 지키면서도 글로벌 냉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스케일과 내용이 다른 이 영역들을 넘나들 수 있는 지적 행위가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인지하면서 짧은 한 학기를 보냈다. 또한 20세기 후반 글로벌 역사의 인식을 위해서는 역사적 사실들을 배우는 것만큼, 변화하는 중첩적인 역사적 현실을 명료한 사회과학적 언어로 개념화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항상 염두에 두고 진행했다.

학생들에게 이러한 실험적 시도가 실제로 어떻게 다가갔을지 궁금하지만, 최소한 사회과학 내에 존재하는 분업의 경계 그리고 사회과학과 인문학의 관계에서 생각보다 높은 기존의 벽을 넘고자 하는 목적의식은 전달됐을 것으로 믿는다. 사회과학의 탈분업의 움직임, 그리고 이를 위해서 글로벌 역사를 두눈 부릅뜨고 다시 공부해야만 하겠다는 의지는 결코 서울대 캠퍼스의 16동 주변에만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 아니다. 한 예로 본인이 몸담고 있는 영국 캠브리지대에서도 지난 몇 년간 흡사한 고민이 있었고 마침내 올 가을부터 국제관계학·사회인류학·글로벌 히스토리가 모이는 새로운 학제적 프로그램이 열린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러한 움직임들이 새로우면서도 전혀 새롭지 않다는 것이다. 주지하듯이 사회과학의 현재 분업체계는 많은 부분 냉전의 부산물이다. 20세기 초반 사회과학의 조직적 지평은 지금과는 많이 달랐다. 예를 들어 당시의 사회인류학 연구는 (부족)사회들의 상호관계에 대한 이론적 관심을 중요한 부분으로 두고 있었고, 이런 의미에서 현재의 국제관계학과 흡사했다.

앞으로의 사회과학이 탈분업의 사회과학이라면, 이 움직임은 어찌보면 과거의 총체적인 사회과학의 정신을 회복하고자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 회복의 과정이 글로벌 역사, 특히 냉전의 글로벌 역사를 주축으로 진행되는 것은 또 다른 의미를 가진다. 냉전의 세계사에서 한반도만큼 예외적인 입지를 가지는 곳이 또 있는가? 이 역사적으로 특이한 땅에서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세계의 역사를 끌어안으며 이 역사를 고전적이면서도 새로운 사회이론의 개념으로 명료하고 적절하게 이해하고 이 이해를 바탕으로 자신감 있게 미래로 전진하는 많은 후학들을 16동 주변에서 또 다시 만날 것을 기대한다.

 

권헌익
영국 캠브리지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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