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져 가는 고문의 기억

▲현재 건설안전본부가 사용하는 남산의 옛 안기부 청사 © 신문수 기자

 

‘중앙정보부’(중정)는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킨 1961년, 김종필씨를 초대 부장으로 창설됐다. 공공연한 정치개입과 인권 탄압을 일삼던 중정은 1980년 12월 31일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로 확대겙냔玆튼? 1999년 1월에는 ‘국가정보원’으로 개명됐다. 1993년 서초구 내곡동으로 이전할 때까지, 남산 안기부 청사는 최형우 전 내무부 장관과 고은, 김지하, 천상병, 황석영 등 문인들의 고문장소로 악명이 높았다.

 

 

전국 곳곳에 설치된 ‘보안분실’에서도 빈번하게 고문이 자행됐다. 경찰청 소속의 홍제동과 남영동, 서울지방경찰청(시경) 소속의 장안동 등이 유명하며, 특히 남영동 보안분실에서는 1985년 김근태 고문사건과 1987년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비록 계통은 다르지만 총괄 부서는 안기부였기 때문에 ‘남산’은 공권력 남용의 상징이자, 공포 정치의 대명사였다.

 

공포 정치의 대명사 ‘남산 안기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유영래 사무처장은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4학년이던 1973년, ‘검은 10월단 사건’으로 끌려가 고문을 받았다. 그는 이념써클 ‘등임회’회원 7명과 함께 종로구 사직동의 시경 보안분실로 끌려가 “용공 국가전복 단체를 조직하고 내란음모를 꾸몄다”는 자백을 강요받았다. 일주일 이상 계속된 집단구타와 물고문, 전기고문으로 그는 3일 동안 혼수상태에 빠졌다. 당시 고문의 충격으로 유영래 사무처장은 1973년부터 1981년까지 결핵을 앓았고 허리디스크 소실 진단을 받아 아직도 정기적으로 병원에 다니고 있다.

 

 

또 1980년 5월 18일, 당시 전남대생이던 정태기씨는 길에서 갑자기 연행돼 광주 경찰서(현 광주동부경찰서)로 끌려갔다. 시위에 참가했느냐는 경찰관의 추궁을 받았지만 전혀 관련 없는 정씨는 부인했다. 그러나 경찰은 그를 곤봉으로 난타한 뒤 시위 참가자로 분류해 상무대 영창으로 끌고 갔다. 정씨는 1991년부터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일주일 이상 식사를 전혀 하지 않거나, 부모님께 욕설을 해 정신병원에 3개월간 입원, 치료를 받았다. 퇴원했지만 1995년 9월 또다시 정신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톱과 망치를 들고 “나를 고문한 놈 똑똑히 알아 놨으니, 언젠가는 복수하겠다”고 외치는 등 이상행동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현재까지도 광주 요한병원에서 정기적인  상담과 약물 치료를 받고 있다.

 

 

지난 2000년 7월부터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등에관한법률’이 시행돼, 신고된 피해자는 9천여 명에 이르고 있지만 보상내용은 미흡하다는 지적이다. 16대 국회에서 ‘판명 기준이 불명확하다’는 한나라당 의원들의 반대로 보상 대상과 액수가 대폭 축소됐기 때문이다. ‘전국민주화운동관련상이자연합’ 황용수 고문은 “2001년에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았으나 그뿐,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했다”며 씁쓸해 했다. 

 

신고된 피해자만 9천여 명 보상도, 치료도 미흡해

 

한편 고문 피해자들을 위한 치료 시설도 전무했다. 지난 10월 1일에야 국내 최초로 전남 담양군에 ‘고문피해자재활센터’가 개설됐다. 한국인권복지센터 부설 ‘고문등정치피해자를돕는모임’ 공동대표 변주나 교수(전북대겙HG逵?는 “정부뿐만 아니라 시민사회단체에서도 고문 피해자에게 관심이 없다”며 “국제기구에 지원을 요청하면 OECD 국가이자 국회에서 ‘고문방지를위한유엔협약’을 비준하기도 한 한국이 고문 피해자의 인권에 정말 그렇게 무관심한지 반문하곤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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