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있을 법한’ 이야기
소설: ‘있을 법한’ 이야기
  • 정유진 기자
  • 승인 2016.09.04 04:4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970년대는 급속한 산업화로 인해 한국 경제가 한창 성장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오직 성장만을 위해 숨차게 달려가는 가운데 삶은 쉽게 경시됐고, 도시 빈민·노동 착취·무분별한 개발 등 여러 사회 문제와 모순이 발생했다. 그 시기 쓰여진 소설들은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 돼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그로부터 40여 년이 지났다. 대한민국의 2016년은 과연 1970년대에 쓰였던 이야기들 앞에서 얼마나 떳떳할 수 있을까. 지금의 우리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이야기라고 결백을 주장하고, 소설은 그저 허구의 이야기일 뿐이라며 등을 돌릴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작가들이 작품에서 다루고자 했던 문제의식은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수 있다.

그들이 길 위를 떠날 날은

“어쩌면 자네들은 혜택을 못 받게 될지도 모를 텐데? 돈이 생겨, 술이 생기는가, 도대체 뭘 바라구 이런 짓을 벌이나? 덮어놓고 불평 불만을 터뜨려 보자는 식이로군.”

“우리가 못 받으면, 뒤에 오는 사람 중 누군가 개선된 노동 조건의 혜택을 받게 될 거요.”

-황석영, 『객지』 中

 

 

그들은 망루로 그리고 광고용 철탑으로 목숨을 걸고 올랐고, 전국 각지에서 홀로 피켓을 들고 항의했으며, 동료의 영정을 든 채 백 리 길을 걷기도 했다. 지금은 잠시 서 있기도 힘든 폭염이 내리쬐는 날씨에 온종일 길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자리를 지킨다. 유성기업 노조의 이야기다.

회사와의 갈등이 시작된 것은 2011년이었다. 노조는 월급제·주간 2교대제를 약속한 것이 지켜지지 않은 것에 대한 항의로 파업에 돌입했으나, 회사는 오히려 직장을 폐쇄하며 용역을 동원해 노조를 진압했다. 복귀하는 노조원에게 ‘나는 개다’를 복창시킨 후에야 공장에 들여보내기도 했다. 또한 사측에서 제2노조를 조성해 기존 노조와 업무, 징계 등에서 차별 대우를 했다. 그런 와중 지난 3월 17일 사측의 잦은 징계·고소 등으로 인해 우울장애 고위험군 판정을 받은 고(故) 한광호 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노조파괴, 그리고 조합원 고 한광호 씨 죽음에 대한 사과와 재발방지책 마련을 촉구하기 위해 그들은 오늘도 어김없이 길 위를 지키고 있다. “언제까지 이 곳에 계실 건가요?” 기자의 질문에 한 조합원은 씁쓸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답했다. “끝날 때까지.”

우리 집 대문이 무너지던 날

“우리집이, 이웃집이, 온 동네의 집들이 보이지 않았다. 방죽도 없어지고, 벽돌 공장의 굴뚝도 없어지고, 언덕길도 없어졌다. 난장이와 난장이의 부인, 난장이의 두 아들, 그리고 난장이의 딸이 살아간 흔적은 거기에 없었다.”

- 조세희,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中

 

 

독립문역 3번 출구에 세워진 펜스는 몇 개월째 행인들의 시야를 답답하게 가로막고 있다. 제자리에서 뛰어올라 봐도 도저히 안을 들여다볼 수 없을 만큼 높다란 펜스 안에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지난 5월 17일, 용역업체는 크레인을 끌고 옥바라지골목에 진입했다. 사방에 하얀 소화기 분말이 흩뿌려지고 건물 내부의 거주민들은 끌려나왔다. ‘행정 대집행 인권매뉴얼’과 ‘재개발·재건축·뉴타운 정비사업 강제철거 예방대책'의 내용에 어긋나는 폭력적인 강제철거가 일어난 것이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급하게 달려왔지만 이미 상당수 건물은 철거된 뒤였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 공사를 중단하겠다”는 서울시장의 말과 함께 철거는 중지됐다. 옥바라지골목을 지키고자 하는 시민운동가와 주민들은 번갈아 길 위의 천막에서 잠을 자며 해결을 촉구했으나, 대책위와 재개발조합은 번번이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결국 몇 개월간의 공사 중지로 인해 손해를 본 조합 측이 지난 8월 22일 강제철거를 재개해 갈등이 심화됐다. 26일 극적으로 합의에 성공했으나, 이는 모두가 만족하는 합의가 아닌, 오랜 투쟁으로 지쳐버린 주민들 그리고 이미 구본장 여관을 포함한 대부분의 건물이 철거된 데에 기인한 합의로 알려졌다.

그 물 아래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그래도 고향이 없어져 뿔고 정든 사람덜이 뿔뿔이 풍지박산되야 뿐졌는디 으찌.”

“딱하게 됐습니다.”

“그라니께 우리는 뿌리 없는 나무여라우. 우리헌티 땅이 있소, 기술이 있소?”

사진제공: 사진가 박용훈

“없어지다니 뭐가요?”

“방울재가 없어졌지라우. 몽땅 물에 쟁겨 뿌렸어유. 남은 것이라고는 저 뒷골 감나무뿐인갑네유.”

-문순태, 『징소리』 中

 

지나온 시간의 기억들이 곳곳에 묻어 있는 집, 대문을 열고 몇 발짝만 걸으면 만날 수 있던 이웃사촌,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게 해주었던 농토. 하나의 마을은 단순한 거주지가 아니라 주민들의 정서, 생계 그리고 삶 전체를 단단하게 받쳐주는 지반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마을은 이제 물 아래에 잠겨있다.

기본 계획이 고시된 후 겨우 6개월만인 2009년 12월, 경상북도 영주에서는 4대강 사업의 마지막 공사인 영주댐이 착공됐다. 500여 가구가 수몰 대상에 포함됐고, 이 중 400년 전통의 인동 장씨 집성촌인 금광마을이 있었다. 한때 반대 대책위가 꾸려졌으나, 대부분이 고령층인 주민들은 ‘국가가 하는 일이니’ 하며 어쩔 수 없이 자포자기하기도 했다.

고시 당시의 금광마을에는 40여 가구가 모여 살고 있었지만, 지금은 채 절반도 되지 않는 17가구만이 금광이주단지로 옮겨와 살고 있다. 네비게이션이 물 속을 가리키는 바람에 한참을 헤매다 찾은 금광이주단지에서 장중덕 이장은 말문을 뗐다. “다들 이웃사촌처럼 친하게 지냈고, 아무래도 집성촌이다보니 보통 마을보다는 더 특별한 사이였죠.” 이주단지가 아닌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긴 주민들에 대해 묻자, 그는 “거의 만날 수가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댐이 삼킨 것은 이웃들 간의 정뿐만이 아니었다. 장중덕 이장은 현실적으로 가장 큰 문제는 앞으로의 생계유지라고 말했다. “받은 보상금이 떨어지면 자식들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농사를 짓고 싶어도 땅이 없고, 다들 노인들이라 다른 기술도 없고, 그렇다고 고향을 떠날 수도 없으니….”

1인당 국민소득이 지난 1970년 254달러에서 2015년 2만 7천 달러로 성장할 만큼의 긴 시간이 지났다. 하지만 아직도 부당한 노동 조건에 항의하다 직장을 잃거나 혹은 항의 자체를 탄압당한 사람들, 그리고 개발로 인해 몇 십 년간 살아왔던 곳을 어쩔 수 없이 떠나게 된 사람들이 우리 곁에 있다는 점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40여 년 전 소설들은 그저 ‘있을 법한’ 이야기를 써내려간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당시 일어난 일의 기록이며, 지금도 존재하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어질 현실의 이야기였다.

 

삽화: 이은희 기자 amon@snu.kr, 이종건 기자 jonggu@snu.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