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냐 혁명이냐
유희냐 혁명이냐
  • 이경인 기자
  • 승인 2016.10.02 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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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의 대화] 소설가 정지돈

최근 한국문단의 신예 소설가들에게 가장 자주 붙는 수식어는 소설답지 않은 소설을 쓰는 작가다. 소설의 내용과 형식 모두가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모습을 하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는 소설가는 단연 정지돈 작가다. 2013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으로 등단한 이래, 2015년 젊은작가상 대상, 2016년 문지문학상 등을 차례로 수상한 그는 최근 문단의 가장 큰 관심을 받는 작가 중 하나다. 그런 그가 최근 첫 단편집 『내가 싸우듯이』를 내놓았다. 첫 단편집이 출판된 소감을 묻자 그는 “아무 느낌이 없었고 그냥 책이 예쁘다고 생각했다”면서도 “작품을 묶고 순서를 배치하는 과정에서 제가 가지고 있던 사고의 흐름이나 생각의 변화가 보이는 게 재미있었어요”라고 말했다.

그의 첫 단편집 제목이 『내가 싸우듯이』인 것은 대단히 선언적이다. 소설집의 제목과 같이 정지돈은 소설에 얽힌 여러 고정관념에 계속 싸움을 거는 작가다. 그는 “전 소설의 해체나 파괴를 염두에 둔 적이 없어요”라고 말했지만 그의 작품은 늘 소설을 해체하는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를 두고 그는 “단지 소설에 대한 이분법적인 구분이 있는 것일 뿐”이라며 “소설을 쓸 때 이런 구분선을 재배치해보자고 생각해요”라는 말을 덧붙였다.

『내가 싸우듯이』의 첫번째 챕터에 속한 네 작품에는 모두 '장'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정지돈 작가는 "처음에 글을 쓸 때 마음에 드는 작품에는 다 장이 들어 있었다"고 했다. 그는 "의도한 것이 아닌데도 점차 소설에서 장이 사라지고 장이 없어도 소설이 잘 써지기 시작했다"며 자신의 소설이 자기도 모르게 변해가고 있는 과정을 보는게 재밌다고 했다.

소설에 얽힌 고정관념 깨뜨리기

설명이 안 돼. 내러티브가 아니라 문장으로 말하는 소설이야.

-「뉴욕에서 온 사나이」 중에서

정지돈 작가의 「나는 카페 웨이터처럼 산다」에는 아방가르드 미술의 대표 격인 마르셀 뒤샹에 관한 이야기가 소설의 전면에 등장한다. 정지돈은 “뒤샹이 글을 되게 많이 썼는데, 한국에서는 단 한 권도 제대로 번역된 적이 없다”며 “한국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아방가르드 예술에 관심이 많다”고 말했다. 소위 전위예술, 반예술로 일컬어지는 아방가르드 예술은 기존의 현대예술이 가진 제도적 고착화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다시 실천적인 예술을 지향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가 아방가르드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어쩌면 그의 예술론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는 한국문단의 고정관념을 혁신하려는 아방가르드적인 작가다. 먼저 리얼리즘의 문제가 그렇다. 정지돈은 평단이 자신의 작품을 두고 문학을 위한 문학, 현실과는 동떨어진 문학이라는 평가를 내린 것을 두고 “애초에 리얼리즘은 단 한 번도 리얼한 것과 관계가 있었던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리얼리즘은 형식적인 요소에 불과하다”며 “사람들은 소설이 리얼해서가 아니라 소설의 서사적 배치나 인물의 구성과 같은 형식적인 요소를 보고 리얼하다는 착각을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현실, 실제를 의미하는 ‘리얼’이라는 단어와 문학의 형식적 구조일 뿐인 ‘리얼리즘’을 혼동함으로써 리얼리즘 소설은 ‘리얼해야 한다’는 착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가 말하는 소설에서의 리얼리즘이란 소설을 사실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형식적 장치를 의미하며, 리얼리즘이 그 자체로 소설의 사실성을 담보해주는 것은 아니다. 정지돈은 “실제 세상을 담는 게 리얼리즘의 본질이라면 리얼리즘 소설은 존재하지 않는다”며 실제적인 소설은 존재할 수 있지만 소설이 실제적일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소설의 본질이 얼마나 세상을 현실적으로 묘사했는가에 있지 않다는 그의 말은 한국문학의 오랜 전통이자 관습으로 군림해온 리얼리즘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그는 소설이라는 장르 자체의 구분선에도 의문을 제기한다. 예컨대 주인공 ‘나’의 독서습관이나 친구와의 여행일지가 담긴 「주말」은 거의 작가 본인의 수필에 가까운 느낌을 주고, 「건축이냐 혁명이냐」에서는 조선의 마지막 황자 이구의 이야기, 그리고 건축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가 뚜렷한 플롯이나 내러티브 없이 논픽션적인 형태로 전달된다. 「만나는 장소는 변하지 않는다」에서는 아예 정지돈이라는 주인공이 등장하며 독자를 당황시킨다.

정지돈 작가는 “설명문적인 요소와 수필적인 요소가 소설의 서사와는 상관없이 툭 튀어나오는 느낌도 재미있을 것이라 생각했다”며 “부자연스러운 접합이 주는 정서적인 환기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소설적 글쓰기란 어떠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비틀고 싶은 마음에서 의도적으로 소설 속의 문장을 새롭게 배치하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소설이 허구의 서사를 바탕에 두는 문학으로서 설명문이나 수필과 명확히 구분돼야 한다는 것 역시 하나의 고정관념에 불과하다. 소설을 소설만으로 봐야 한다는 환상, 정지돈 작가는 그 환상에 의문을 제기한다.

독창성이라는 신화 허물기

일주일치에 불과한 장의 일기가 꽤나 긴 것은 일기의 반이 『창백한 말』의 인용이기 때문이다.

-「창백한 말」 중에서

정지돈 작가의 소설들을 가만히 보면, 장난스럽다 싶을 정도로 실재하는 작품이나 역사적 사실을 인용하는 부분이 많다. 단편집 뒤에 박사 논문 수준으로 많은 참고 문헌 목록이 실려 있는 것에서부터 이 사실이 드러나고, 「눈먼 부엉이」나 「창백한 말」은 동명의 소설 제목을 그대로 차용해서 제목으로 활용하고 있다. 「뉴욕에서 온 사나이」의 레이날도 아레나스나 「건축이냐 혁명이냐」의 이구는 정지돈 작가의 소설 속 인물이지만 동시에 실존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정지돈은 소설의 제목을 다른 작품에서 그대로 차용한 이유를 묻자 “그냥 제목 짓기가 어렵잖아요”라는 너스레를 떨다가도 “사실 제목만 같을 뿐이지 두 소설 사이의 정서나 구조는 전혀 다르다”며 이 차이에서 발생하는 낙차가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사데크 헤다야트의 『눈먼 부엉이』가 인간의 부조리를 탐구하는 어두운 분위기의 작품인 데 반해 정지돈 작가의 「눈먼 부엉이」는 헤다야트 소설의 한국어 역본을 구하려는 남자의 책 찾기를 중심으로 한 가벼운 분위기의 작품이다. 그는 “동명의 다른 소설이 있는지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새로운 사실을 알려 줄 것이고, 알고 있던 사람에게도 제목만 같지 내용이 다르다는 점에서 정서적 환기가 있을 것”이라며 소설에 일종의 링크를 걸어주는 게 재밌다고 말했다.

소설이란 작가의 상상력을 바탕에 두는 이야기라는 정의에 따르자면 정지돈 작가의 소설은 독창성이 부족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이 생긴다. 하지만 정지돈 작가는 “독창성이라는 것 자체가 정말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라고 말한다. 독창성이란 국가와 산업에 의해 저작권 개념이 생기면서 만들어진 허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예술은 창작자의 경험에서 비롯되고, 그 경험은 아무리 예술가만의 독자적인 경험일지라도 타인과의 대화나 교류 없이는 성립되지 않는다.

그는 애초에 자아라는 개념부터 독창성이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제 이야기가 정말 제 이야기인지가 저도 헷갈릴 때가 있어요”라고 말했다. 자기가 쓰고도 낯설어 보이는 작품이 부지기수고, 실제 삶에서도 스스로가 생소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애초에 언어의 전체적인 체계부터가 외부의 말이나 글로 습득되는 것이라면 언어를 바탕으로 한 모든 것들은 자기 이야기면서도 자기 이야기가 아닌 것이 된다. 정지돈 작가의 소설 속에 상호적인 텍스트가 적극적으로 활용되는 것은 그가 소설을 독창적인 창조물이 아닌 대화와 교류의 산물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진지한 말장난과 유희적인 글쓰기

만약 우리의 삶이 우리에게 속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우리의 삶과 우리의 삶이 아닌 것을 더 이상 구분하지 못한다면

-「나는 카페 웨이터처럼 산다」 중에서

인터뷰를 진행하는 동안 정지돈 작가가 가장 많이 한 말은 “재밌잖아요”였다. 그는 소설을 재밌어서 쓰는 작가다. 이를 증명하듯 평단에서 그를 비판할 때 가장 많이 지적되는 것도 그가 소설을 유희적으로 쓴다는 태도의 문제다. 소설이라면 모름지기 어떤 성찰이나 고뇌가 담겨야 하는데 정지돈 작가의 소설 속에는 조형예술, 건축, 영화, 소설 등 예술 자체에 관한 이야기만 가득하지 진지한 내용은 부족하다는 평이다. 이를 두고 정지돈은 “세상의 고통에만 주목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세상의 고통을 유희하는 사람들 같아요”라고 말했다.

평단에서 언어의 형식적 활용에 치중하는 작가들에 대한 평가절하로 사용했던 말이 ‘유희적 글쓰기’다. 정지돈은 그런 평단을 비판하며 글의 핵심에 즐거움을 두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즐거움이라는 건 기쁨은 물론 슬픔과 고통도 포함된 감정”이라며 즐거움과 가벼움은 결코 같은 말이 아님을 확실히 했다.

재미있는 글쓰기를 지향하는 덕분인지 그의 소설 속에는 재치있고 독특한 표현들이 가득하다. 「눈먼 부엉이」등의 소설에서 ‘나는 비행기가 서쪽을 향해 날아가는 모습을 보았다(사실 그가 탄 비행기인지 확신은 못 하겠다)’처럼 서사 맥락과는 전혀 상관없는 말이 담긴 소괄호가 빈번하게 사용되며 독자의 흥미를 유발한다. 긴 문장을 활용한 말장난이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도 정지돈 소설의 주요한 특징이다. 그는 서술어를 뒤에 배치하는 한국어의 특징을 언급하며 “한국어는 문장을 길게 나열한 다음 마지막에 글 자체를 전복시켜버릴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문장을 끝날 듯 끝나지 않게 이어갈 수 있는 한국어만의 리듬이 재미있다”며 그의 소설 곳곳에서 만연체가 활용되는 이유를 설명하기도 했다.

「나는 카페 웨이터처럼 산다」의 제목과 소제목이 소설의 서사와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것이나 「뉴욕에서 온 사나이」, 「미래의 책」 등에서 소설 속의 소설이 등장하는 이중 구조 역시 인상적이다. 그는 “언어는 살아있는 생명체와 같다”며 “작품 속의 작품도 결국 살아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그에게는 작품 속에 등장하는 작품들이 작품 속 등장인물과 다를 바 없다. 작품과의 구체적인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제목들 역시 살아 움직이기는 마찬가지다. 그는 “제목과 내용 간의 부조화가 생기면 독자에게는 생각해 볼 지점이 생긴다”며 생뚱맞은 내용을 읽게 되면 독자들은 그것에 관심을 가지고 좀 더 능동적으로 숨은 의미를 탐색하려 한다고 전했다. 이상한 제목이 독자들을 책 속으로 더 깊이 빠져들도록 손을 내민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표현 기법들을 사용하는 이유에 대해 모두 “재미있어서요”라고 답했다. 그는 자기가 원래부터 말장난을 좋아한다며 “말장난만큼 중요한 게 없다”는 에세이스트 서경식의 말을 인용하기도 했다. 그는 우리의 인식 체계 자체가 언어를 통해 구조화돼 있기 때문에 새로운 이야기 역시 말장난을 통해 언어를 비틀어야만 만들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정지돈 작가와의 인터뷰가 진행되는 사이 해가 완전히 저물고 어느새 짙은 어둠이 깔린 밤이 찾아왔다. 인터뷰를 끝마치며 정지돈은 자신의 소설이 소위 난해한 소설로 치부되는 것에 대해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는 “제 소설은 어려운 소설이 아니라 우리에게 고정관념처럼 굳어진 맥락을 조금 비튼 것에 불과합니다”라며 “그런 생소함을 그냥 재밌게 즐겨 주시면 감사할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그는 자기가 등단했을 때 어떤 소설가 선배가 자신의 소설을 팝에 비유한 것을 회상하며, “되게 유머러스하고 재밌는 팝 음악을 듣는 것처럼 그냥 재밌게 웃으면서 제 작품을 읽어주시면 됩니다”라고 말했다. 그의 소설은 경직된 한국문단을 뒤집는 혁명적인 글이자 팝 음악처럼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재미있는 글이다. 소설은 유희냐, 혁명이냐는 물음에 ‘둘 다 맞다’는 대답을 내놓을 정지돈 작가의 소설이 앞으로는 어떤 모습으로 변화를 이어나갈지 기대된다.

캡션: 『내가 싸우듯이』의 첫 번째 챕터에 속한 네 작품에는 모두 ‘장’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정지돈 작가는 “처음에 글을 쓸 때 마음에 드는 작품에는 다 장이 들어 있었다”고 했다. 그는 “의도한 것이 아닌데도 점차 소설에서 장이 사라지고 장이 없어도 소설이 잘 써지기 시작했다”며 자신의 소설이 자기도 모르게 변해가고 있는 과정을 보는 게 재밌다고 말했다.

사진: 이문영 기자 dkxmans@snu.kr

삽화: 이은희 기자 amon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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