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하, 밥 준다는 이유로 목줄 채우려 들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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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학신문
  • 승인 2016.11.06 0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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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포터스 초이스] 릴레이 연극 페스티벌 - ‘권리장전 2016 검열각하’

릴레이 연극 페스티벌 ‘권리장전 2016 검열각하’가 ‘검열의 가위에 맞선 연극의 가위’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연우소극장에서 6월 9일(목)부터 10월 30일(일)까지 22개 극단이 참여한 가운데 장장 5개월에 걸친 대장정을 마쳤다. 『대학신문』 문화부 기자들도 개막부터 폐막까지 긴 호흡을 같이 했다. 그렇게 고른 리포터스 초이스를 여기 선보인다.

 

「검열언어의 정치학: 두 개의 국민」

- 드림플레이테제21

7월 13일~24일, 개막작

파워포인트 화면에 기사 자료가 뜨고 아나운서가 등장하더니 뉴스 생방송 현장이 눈앞에 펼쳐진다. 이 극은 전형적인 드라마가 아니라 살아 있는 다큐멘터리다. 사실주의 연극을 선보여 왔던 극단 ‘드림플레이테제21’(연출 김재엽)가 실제 사건을 꼼꼼히 취재하고 분석해 실제 발언을 무대에서 재연하는 연극 형식인 ‘버바팀’ 연극을 시도한 것. 개막작이었던 이번 극은 박근형 연출가 ‘창작산실’ 검열 사태와 관련된 기록을 바탕으로 사건을 치밀하게 재구성해 보여준다. 국회 청문회장을 주된 배경으로 하는 세트에서 배우들은 박근형 연출가, 도종환 국회의원, 김종득 문화체육관광부장관 등 실제 인물을 연기한다. 스크린에 뜨는 근거자료와 대사, 제스쳐와 표정 하나하나에서 사건을 꼼꼼히 취재하고 예리하게 분석한 그들의 노력이 묻어나 개막작으로 손색이 없었다.

검열 정황을 나열하며 논리를 세워가는 과정은 박진감 넘치는 여우사냥을 연상케 한다. 이들이 잡아들이려는 ‘여우’는 바로 검열의 주체가 검열을 할 때 사용하는 언어인 ‘검열 언어’다. 극 속에서 검열의 주체들은 자신들의 처사는 합리적인 판단이었을 뿐이라며 ‘검열은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이 내뱉었던 언어의 기록들은 극 중 재구성을 통해 검열을 명백히 시인하는 꼴이 된다. 극은 한걸음 더 나아가 “너희, 할 말 없지?”라며 목줄 쥔 주체의 손을 옥죈다. 결국 국정감사에서 검열 주체는 제대로 된 논리 없이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막무가내로 ‘틀림’으로 낙인찍고 ‘국민’에서 배제해 버리며 밑천을 드러낸다. 극은 검열의 주체가 검열 행위를 정당화할 사유를, 그리고 그 언어를 발견해내지 못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치열하게 논리를 쌓아나가던 연극은 막바지에서 살짝 삐끗한 듯 보였다. 잘 눌러왔던 감정의 둑이 터져버린 듯 급작스레 고조된 감정선이 관객을 의아하게 한 것. 특히 당시엔 블랙리스트가 확증되지 않아 이런 뜨거움이 다소 때이르게 느껴졌다. 하지만 결국 현실에서 블랙리스트의 존재가 극의 주인공이었던 도종환 의원에 의해 밝혀졌으니, 이 뜨거움은 오히려 진실에 더 가까웠을지 모른다. 극은 마지막으로 이런 질문을 던진다. ‘언제든 검열당할 수 있는 우리는 어떤 언어로 검열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이 문장은 어쩌면 의문문이 아니라, 차마 억누를 수 없었던 뜨거움을 뒤로하고 치열하게 검열 언어에 대한 고민을 이어간 자신들과 함께 하자는 청유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조수지 문화부장 s4kribb@snu.kr

 

「이반검열」

- 전화벨이 울린다

8월 4일~7일

‘이반’. ‘일반’이라는 테두리에서 벗어났다는 뜻으로 2000년대까지 흔히 성소수자를 규정하는 말로 쓰였다. ‘이반검열’은 10여 년 전, 동성애자 청소년을 색출하겠다며 ‘이반으로 보이는 수상한’ 청소년의 행동을 규제했던 데서 비롯된 단어다. 「이반검열」(연출 이연주)은 이반검열을 다룬 이영 감독의 동명의 영화에서 모티브를 얻어 청소년 동성애자와 세월호 유가족 및 친구의 목소리를 담아냈다.

책걸상 4개와 4명의 배우. 단출한 무대에서 배우들은 동성애자 청소년과 세월호 유가족을 연기한다. 시선, 학교, 검열이라는 키워드로 점진적으로 연출되는 장면들은 그들이 일상 속에서 어떤 차별과 배제를 겪는지 담담하게 엮어나간다. ‘불쌍하지만 더러워’ ‘순수한 피해자가 아니네’라는 끈적한 시선과 수군거림은 “가만히 있으라, 존재를 드러내지 말라”는 문장으로 축약된다. 결국 극이 말하는 검열은 특수한 사건이 아닌, 소수자의 목소리를 배제하고 부정하는 근간에 깔린 폭력성 자체다. 이런 미시적 차원의 검열은 우리 모두가 피해자가 될 수 있는 문제로 확장된다.

그렇다면 이런 미시적인 폭력은 어디서 기원했을까. 암전 후 이어진 후반부에선 똑같은 옷을 입은 배우들만 무대에 덩그러니 남아있고, 머리 위에 걸린 태극기가 유독 빛난다. 유신시대의 건전가요가 흘러나오면서 배우들은 확성기에서 흘러나오는 강압적인 목소리의 지시대로 군무를 춘다. 한 치의 어긋남 없이 명령을 익힌 그들은 곧 자발적으로 ‘동성애 OUT’ ‘세월호 OUT’이 적힌 피켓을 당당하게 치켜든다. 결국 ‘이반’의 존재를 지워버리려는 미시적 차원의 검열이 바로 거대한 국가 권력에 의해 학습되면서 나타난 결과라는 것. 그렇게 극은 권력에 의한 프레임을 학습 받은 우리 모두가 검열 가해자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연결성에 대해선 조금 더 고민이 필요할 듯 싶다. 세월호 유가족과 성소수자의 연결성, 그리고 미시적인 차원에서 접근하던 전반부에서 거시적 관점으로 옮겨간 후반부로의 연결성이 잘 드러나지 않았던 것. 더불어 비당사자로서의 한계를 완전히 탈피하기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성소수자 중에서 동성애자의 목소리만 담겼고, 2000년대 초 자료를 바탕으로 해 전형성을 탈피하지 못한 모습을 재생산했다. 하지만 감정을 최대한 배제했음에도 객석에서 깊은 숨을 들이키는 소리와 훌쩍이는 소리가 간간이 들렸으니, 이야기에 응축된 아픔을 잘 풀어내 드러낸 극이었음은 틀림없다.

조수지 문화부장 s4kribb@snu.kr

「삐끼ing」

- 크리에이티브 바키

8월 11일~14일

 

대학로를 거닐다 보면 “예매하셨어요?” “연극 보러 오셨어요?”하고 묻는 사람을 쉽게 마주친다. ‘삐끼’라고 불리는 이들은 대학로에서 펼쳐지는 공연을 한데 모아 소개해 주지만, 가끔은 몇 가지 공연만을 슬쩍 내밀며 이게 전부라는 듯 말하기도 한다. 연극 「삐끼ing」(연출 이경성)은 이들처럼 관객들을 불러모아 삐끼에게 붙잡히는 경험을 선사한다.

극이 시작되기 전날, 서른 명쯤 되는 관객들은 한 카톡방에 초대된다. 지령에 따라 이어폰을 끼고 한 카페에 모여앉은 ‘관객’들은 카톡방 속 ‘삐끼’의 지시에 따라 수동적으로 카톡방에 올라온 영상을 보고, 풍경 사진을 찍어 올리고, 급기야는 카페를 뛰쳐나가 대학로를 활보하며 미션을 수행한다. 배우들은 관객들 속에 숨어 있다 나타나서 온갖 지시에 따르는 인형이 되기도 하고, 카톡방 속 삐끼 대신 앞장서서 길을 안내하는 가이드가 되기도 한다.

삐끼의 호객행위를 따라가면서 관객은 일상에 스며든 크고 작은 ‘검열’과 맞닥뜨린다. 공연에선 사찰 논란에도 대다수가 사용하는 ‘카카오톡’처럼 눈에 보이는 검열을 끌어오고, 나아가 얼핏 자유로워 보이지만 삐끼들이 완전히 이끌고 있는 이 여정처럼 우리의 일상이 어떤 검열을 거친 것일지 생각해보게 한다. 게릴라처럼 우르르 몰려다니는 관객들을 수상하게 쳐다보는 행인들은 예상치 못한 재미도 준다.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고 “몰래카메라야?”하며 두리번거리는 사람, 관객들이 일제히 이어폰을 착용하자 영문도 모르고 따라하는 사람 등 ‘검열’을 공연으로 즐기는 관객들에게 도리어 ‘검열’당하며 이들을 웃기는 사람까지 나타난다.

숨가쁘게 대학로를 달린 관객들이 발길을 멈춘 곳은 한 소극장이다. 삐끼의 지시에 따라 관객들은 암전된 극장에서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는다. ‘우리는 달리는 것을 추구한다’는 최인호의 희곡 「달리는 바보들」 속 대사와, 이 극이 1975년에 사회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공연불가 통보를 받았다는 대사가 울리며 극은 마무리된다. 우리에게 스며든 일상 속의 제한부터 문화검열까지, 관객들을 ‘달리는 바보들’로 만든 삐끼들이 일깨워 준 검열의 세계에 우리는 또 무심코 발을 들인다.

고유리 기자 yoori0805@snu.kr

 

「고래햄릿」

- 극단 고래

10월 20일~23일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으로 슬픔에 잠긴 왕자 햄릿. 그에게 선왕의 망령이 나타나 자신의 죽음이 새로 추대된 왕인 클로디어스에 의한 것이었음을 전한다. 햄릿은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선왕의 죽음에 대한 내용을 극으로 기획해 대중 앞에 재연해 보인다. 극을 보고 당혹감과 불안을 느낀 클로디어스는 햄릿을 독살할 계획을 세우고, 클로디어스의 초조한 모습에 망령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신한 햄릿은 복수를 결단하며 비극의 전조가 드리운다.

그러나 망령으로 나타난 선왕은 원수를 갚는 대신 사회적 합의를 바탕으로 한 심판을 해야 한다고 거듭 당부한다. 복수와 심판의 기로에서 자괴감에 빠진 햄릿. 클로디어스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햄릿을 해하려 하지만 햄릿은 ‘심판’이라는 이성적 선택 앞에서 자기검열을 거듭해야 한다. 클로디어스를 죽일 기회가 몇 차례 있었지만 자기검열 탓에 결단을 내리지 못한 햄릿은 결국 사랑하는 이들을 잃는 비극을 맞이한다. 회의감에 빠진 햄릿은 보다 더 근원적인 ‘사느냐 죽느냐’에 대한 인간 실존의 문제를 마주하게 된다.

원작에선 선왕의 망령이 사적인 복수를 호소하는 반면 「고래햄릿」(연출 이해성)에선 법의 심판을 따를 것을 지시한다. 이는 동시대성이 반영된 결과다. 현대사회에선 개인적으로 복수를 하는 대신 사회적 합의가 전제된 법의 심판으로 불합리함에 대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극에선 심판이 이뤄질 만한 구체적인 체계는 존재하지 않는 듯 보인다. 이런 설정을 통해 극은 현시대를 비춘다. 복수도 심판도 할 수 없는 불합리한 상황 앞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검열을 하게 되고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냉소주의에 젖어 결국 침묵하는 사회를 만든다. 극에서는 그 결말이 ‘비극’이라고 이야기한다.

「고래햄릿」은 ‘자기검열’을 키워드로 개인 내외적으로 검열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불합리한 환경까지 이야기한다. 복수와 심판 사이에서 ‘무엇이 옳은가’를 고뇌한 햄릿은 결국 비극을 맞이했지만, 그의 고민엔 오로지 욕망으로만 얼룩진 클로디어스에게는 없던 인간 정신의 숭고함이 있다. 각종 정치적 사건부터 예술계 블랙리스트까지 불합리와 억압들이 만무한 지금, 이 극은 21세기 햄릿들에게 불합리함 앞에서 어떻게 맞설 것인지 질문을 던진다.

최소영기자 s101394@snu.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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