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한 편] 영화 「가려진 시간」 - 강유정 영화평론가

강유정 영화평론가

아이의 시간은 가끔 멈춘다

동화 속에는 멈춰진 시간이 종종 등장한다. 『잠자는 숲 속의 미녀』만 해도 그렇다. 공주는 태어나자마자 저주 같은 예언을 받게 된다. 물레에 찔려 100년 동안 잠이 들 것이라고 말이다. 여기서 비록 잠이 들었다고 표현했지만 사실 그 100년 동안은 시간이 멈췄다고 보는 게 옳다. 왕자가 와서 공주를 깨울 때까지 성 안의 시간은 멈춰 있는다. 왕자가 와서 공주를 깨우자 그제야 멈췄던 시간이 흐른다. 브루노 베텔하임이라는 정신분석학자는 이 이야기를 두고, 사춘기의 육체적 성장에 균형을 요구하는 정신적 성장의 알레고리라고 봤다. 멈춰진 채로, 늙지도, 훼손되지도 않는 신체는 정신적 성숙과 어긋나 웃자라 버린 육체적 성장의 메타포 쯤 될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에서도 시간이 멈추는 장면은 등장한다. 소녀 치히로는 터널을 지나고, 강을 건너 요괴들의 세상에 들어간다. 부모님은 이미 금지된 음식에 손을 대 돼지로 변하고 말았다. 치히로는 이름을 담보로 그 세계에 들어가게 되고 마침내 모든 임무를 마치고 부모님을 되찾아 돌아온다. 돌아오니 약간의 시간만 흐른 것처럼, 그러니까 부모님과 치히로가 터널을 지나 버려진 테마파크에 갔다 돌아온 만큼의 시간만 흘러 있다. 하지만 소녀는 부모가 모르는 시간을 경험했고 그만큼 훌쩍 자라 있다. 물리적 시간은 흐르지 않았지만 소녀의 상대적 시간은 성큼 흘러 버린 것이다.

과학적으로야 시간의 상대성 이론처럼 복잡한 이론으로 설명되겠지만,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누구나 그렇게 상대적으로 흘렀던 어느 날의 기억들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하교 후 집에 돌아왔을 때, 아무도 없던 집의 적막과 화이트 노이즈 그리고 그 잠시의 시간을 침범하던 오래고 긴 침묵 같은 것은 시계의 초침이나 분침으로 측정되는 물리적 시간과 다른 감성의 체감 시간을 선사했다.

영화「가려진 시간」(2016)은 이렇듯 소녀와 멈춰진 시간이라는 점에서 아주 오래된, 성장 서사의 어떤 면모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가려진 시간」은 전통적이면서도 새롭고, 오래된 이야기의 깊이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낯설다. 어쩌면, 시간의 마술을 경험한다는 것 자체가 어린이, 아직 성장점을 남긴 아이의 특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소녀 그리고 소년만의 세계

말하자면 장르적으로 환상 서사에 속하는 판타지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개 현실에서의 결핍을 지니고 있다. 「마이 리틀 자이언트」(2016)의 주인공 소피는 10살의 고아 소녀이고「피터와 드래곤」(2016)의 주인공 피터는 5살 때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는다. 흥미로운 것은 그렇게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의지처인 부모를 잃은 아이들에게 ‘리틀 자이언트’나 ‘드래곤’과 같은 조력자가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아이들은 아무리 눌러도 성장한다는 일본의 소설가 사카구치 안고의 말처럼, 역경에 처한 아이들이지만 아이들은 다른 정서적 의존처를 찾고 스스로의 상상력과 용기로 어려움을 헤쳐나간다.

「가려진 시간」의 주인공인 수린과 성민도 겉으로 보면 결핍을 가진 소녀, 소년이다. 수린은 어머니를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잃는다. 어머니가 재혼했던 아버지, 그것도 고작 아버지로 함께 한 지 일 년여밖에 되지 않은 ‘아저씨’를 따라 수린은 노화도에 들어온다. 수린의 소망은 바로 이 세계를 벗어나는 것이다. 수린은 자신의 블로그에 현실의 세계를 떠날 수 있는 수많은 방법을 모아두고, 찾고, 연구한다. 다른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특별히 우정을 쌓고 싶지도 않다. 13살, 초등학교 6학년 수린이에게 이미 세상은 견뎌야만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런 수린에게 성민이 말을 걸어온다. 성민은 보육원에 산다. 성민이 말을 걸자, 수린은 성민에게 묻는다. “너 고아이니?” 사실, 이 질문은 수린의 가장 아픈 상처, 비록 법적 양육자는 있지만 고아와 다를 바 없는 자신과의 동질감을 확인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비슷한 상처를 가지고 있지만 자신과 달리 씩씩하고 다정한 성민에게 수린은 조금씩 마음을 기대게 된다.

영화 속에서 수린과 성민은 서로 ‘암호’를 만들어 둘만의 교환 일기를 나눈다. 수린에게 있어, 암호란 아직 찾지 못한 다른 세계를 이곳에서 실현하는 일종의 대체적 수단이다. 적어도 암호로 이야기를 나눔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세계로부터 분리되고, 남들이 옳다고 주장하는 세상으로부터 동떨어져 지낼 수 있다. 암호가 그들 세계의 질서라면, 버려진 폐가는 그들이 선택한 다른 세상의 물리적 현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암호와 폐가를 통해 그들만의 망명지를 만들어 낸다. 그 둘만의 언어와 공간은 우리가 사랑이라고 말하는 안락한 도피처이기도 하고 한편 격렬한 성장통을 앓는 이들이 그 상처를 회복하기 위해 필요한 장소이기도 하다.

 

되돌릴 수 없는

폐가와 암호는 혼자만 시간을 겪어버린 성민이 수린에게 스스로를 알릴 수 있는 개연적 장치가 되기도 한다. 적어도 암호를 쓰는 이상 성민은 수린에게 입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앨리스가 토끼굴에 들어가고, 해리 포터가 킹스크로스 역에 가듯이 아이들은 보름달이 뜨는 날, 숲 속 오래된 나무 둥치 아래의 동굴로 들어가 다른 세계로 가는 입구 앞에 서게 된다. 함께 있었으나 수린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시간은 멈춰지고, 그만 성민을 비롯한 세 남자아이는 멈춰진 세계 안에 갇힌다.

얼마 전 개봉했던「미스 페레그린과 이상한 아이들의 집」(2016)에서는 타임 루프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이 타임 루프는 아이들이 일부러 시간의 감옥을 만들고 그 안에서만 기거하는 형태를 의미한다. 말하자면 일부러 시간을 멈추고 성장을 거부하며 아이로서의 삶을 반복적으로 연장하는 것이다.

반면「가려진 시간」에서 아이들은 시간의 흐름으로부터 추방된 것으로 묘사된다. 아이들은 정상적 시간에 돌아가고 싶지만 돌아갈 방법을 모르고, 이 추방으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과 멀어지게 된다. 문제는 십 년 이상의 시간이 흐르게 되면서 성민은 이차 성징을 겪게 되고 이제는 더 이상 아이의 외모를 지니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즉 현재의 시간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아무도 그들을 알아볼 수 없는 것이다.

세상이 멈춰 있는 동안 성민의 시간만 흐르고 성민은 나이를 먹어 어른이 된다. 어느 순간이 되면 성민은 성장하는 게 아니라 늙어가게 될 것이다. 성민이 되돌아왔을 때, 그를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남아 있지 않다. 수린과 나눴던 암호와 추억들만이 그의 존재를 확인해 줄 뿐이다.

영화「가려진 시간」은 최근 한국 영화 가운데서 무척이나 이채로운 작품이다. 스릴러, 느와르와 같은 현실에 밀착돼 있는 리얼리즘적 서사가 횡행하는 가운데,「가려진 시간」이 선택한 판타지의 시공간은 무척이나 이질적이다. 그 이질성은 아름다운 시각적 이미지와 소년, 소녀의 순수를 통해 한국 영화가 그동안 보류해뒀던 감성을 건드린다.

「가려진 시간」을 연출한 엄태화 감독은「잉투기」(2013)와「숲」(2012)으로 이미 그 차별적 감성과 장르적 감각을 인정받은 바 있다. 알려져 있다시피,「가려진 시간」에는 강동원 외에는 특별히 유명한 배우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에서 감정을 몰입하게 하는 장면들은 강동원이 등장하는 장면보다는 아역인 이효제와 신은수가 외로움과 상처를 딛고 첫사랑으로 다가가는 장면들이다. 그러한 장면들은「가려진 시간」의 해석할 수 없는 감정을 구성하는, 미학적 미장센으로 자리 잡는다. 멈춰진 시간이 재현된 영화적 장면들의 동화적 세련됨도 눈여겨 볼만하다.

시간은 누구나에게 평등하다고 하지만 그 시간은 하나의 작은 영혼을 범죄자로 만들 수도 있고 뛰어난 예술가를 빚어낼 수도 있다. 성장의 시간이 어느 순간 부지불식간에 노화의 시간으로 바뀌는 것도 시간이 지닌 잔혹함 중 하나일 것이다. 시간에 대한 아름답고도, 색다른 이야기,「가려진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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