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예술가의 초상』과 함께한 나의 젊음과 문학
『젊은 예술가의 초상』과 함께한 나의 젊음과 문학
  • 대학신문
  • 승인 2016.11.20 08:1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독서에세이] 제임스 조이스 『젊은 예술가의 초상』 출간 100년 - 손영주 교수(영어영문학과)

제임스 조이스는 비교적 오랜 기간 동안 많은 시간을 들여 만나면서도 도무지 서먹함이 쉽사리 가시지 않는 작가였다. 한 작가의 것이라 믿기지 않을 만큼 서술 기법이 제각각이었고 같은 작품이라도 매번 생경하고 다르게 읽힌 탓이 크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우연히 집어 들었던 것이 단편소설집 『더블린 사람들』(1914)이었다. 이야기가 끝날 때마다 정말로 끝난 것이 맞나 싶어, 숨어 있을지도 모르는 다음 페이지를 찾아 책장 끝을 만지작거렸던 기억이 난다. 속 시원히 끝나는 맛은 없었지만, 「애러비」라는 단편 소설 속에서 날카로운 바늘처럼 땅을 찔러대는 빗소리를 듣는 주인공 소년의 예민한 귀와 얼얼한 아픔만큼은 생생히 남았던 것 같다. 빗소리만 들으면 살갗이 찔리는 기분으로 사춘기를 보냈으니까.

고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더블린 사람들』의 작가라는 사실보다는 “젊은 예술가”란 말에 이끌려 읽은 것이 『젊은 예술가의 초상』(1916)이다. 이 작품은 스티븐 디덜러스라는 감수성 예민한 주인공이 유년기부터 청년기에 이르는 동안 겪게 되는 정신적, 종교적 갈등과 번민, 그리고 이를 통한 성장과정을 그린 자전적 소설이다. 이 작품에 대한 나의 첫 인상은 썩 좋지 않았다. 『데미안』(1919)과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1774)에서 받은 폭풍감동을 기대했건만, 이야기의 낯선 전개 속에서 허우적대다 끝나고 보니 남은 건 공포와 반감뿐이었던 것 같다. 스티븐이 성당에서 듣는 최후의 심판과 지옥에 대한 사제의 설교에 나는 덩달아 두려움과 죄책감에 떨었다. 아무 죄도 없는 내게 그토록 집요하게 달려들어 겁을 주는 그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싫었다. 스티븐의 목소리도 그 못지않게 부담스러웠던 것 같다. 걸핏하면 시구를 읊조리고 사창가에 가는 ‘죄’를 범하는가 하면 여성을 자신의 영감의 원천으로 삼고 알아들을 수 없는 예술론을 설파하며 자신의 고립과 소외를 은밀히 즐기는 듯한 이 청년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의 이러한 반감은 스티븐의 모습에서 나는 남들과는 다르다는 근거 없는 자의식으로 인해 자초한 고독을 약간은 자학적으로 탐닉하던 내 모습이 겹쳐 보이는, 그 자체로 맹랑한 착시현상의 소산이었다. 어쨌거나 당시 나의 반감은 적어도 십대의 과대망상에서 조금은 냉정한 자기 인식으로의 이행을 가리키는 징표였노라고, 따라서 새삼 꺼내기도 민망한 이 고백에 약간의 면죄부가 될 수 있지 않겠느냐고 우기고 싶어진다.

어렸을 때부터 막연히 교수가 되고 싶었던 나는 장차 교수를 많이 필요로 할 유망한 전공이라며 국어 선생님이 콕 집어주신 학과에 덜컥 ‘소신지원’을 했다. 소위 ‘눈치작전’이 판을 치던 때에 소신지원은 자부심을 느낄 만한 일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내 ‘소신’에 문제가 있었음을 깨달았다. 내가 되고 싶은 것은 교수라는 타이틀이 아니라 취미와 본업이 하나인 삶이었던 것이다. 왠지 모를 불안과 허무감에 시달리다 2학년이 되던 봄, “4월은 잔인한 달”로 시작되는 T. S. 엘리엇의 「황무지」(1922)에 빠져 버렸다. 그 길고 난해한 시를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시를 관통하는 나른하면서도 음울한 여러 개의 목소리가 내 삶의 수수께끼를 푸는 암호처럼 느껴졌다. 취미라고 밀어놓았던 문학과 진지한 데이트를 시작했다. 대학원 입시를 준비하며 비장하게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다시 꺼내 들었다. 그런데 입시준비는 뜻밖에도 나의 독서에 아이러니한 화학작용을 일으켰다. 이 소설은 그 어떤 작품보다 빠르게 모더니즘이니 예술가의 성장소설이니 하는 몇 개의 개념으로 밋밋하게 변신했다. 나는 작품을 인수분해 공식처럼 색색의 펜으로 깔끔하게 정리해 노트에 적어 넣고, “아직 창조되지 않은 내 종족의 의식을 내 영혼의 대장간에서 벼려내기 위해” 가족도 친구도 조국도 모두 떠나겠노라는 스티븐의 결심을 줄줄 외웠다.

유학 시절 조이스 세미나 시간에 만난 『율리시스』(1922)는 ‘고문’이었다. 『율리시스』는 스티븐 디덜러스와 레오폴드 불룸이라는 두 인물을 중심축으로 1904년 6월 하루 동안 일어나는 더블린의 일상을 그린 작품이다. 문학사상 최대의 걸작 가운데 하나라는 명성에 혹하기도 했고 앞으로 수 세기 동안 교수들이 씨름할 수많은 수수께끼를 심어뒀다는 작가의 공언에 약이 오르기도 해서, 작품보다 두꺼운 주석을 끌어안고 몇 날 며칠을 이를 악물고 씨름을 했다. 그러고 나서 내게 찾아온 것은 끝도 없는 문학적 인유와 역사적 사건들, 화장실이나 침실과 같은 내밀한 공간에서부터 술집, 학교, 도서관, 장례식장, 신문사에서부터 해변에 이르는 무수한 장소와 수많은 등장인물들, 그리고 현란한 문체들의 향연으로 인한 피로와 현기증이었다. 더군다나 전작에서의 야심은 어디로 갔는지, 스티븐은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귀국한 이래 더블린의 학교 선생으로 눌러앉아 아직도 예술 타령만 하고 있었다. 한편 궁금하기도 했다. 상당 부분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 스티븐의 초상을 내놓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작가는 어째서 스티븐과는 그토록 다른, 헝가리 출신의 유대인이자 광고업자인 평범한 중년의 남자 레오폴드 블룸에게 이렇게 큰 존재감을 부여하는 것일까. 어째서 스티븐은 초여름 새벽 이 남자의 집에서 따뜻한 코코아를 얻어 마시는 걸까. 물론 수업을 듣고 페이퍼를 쓰는 과정에서 많은 궁금증이 해소됐고 『율리시스』의 놀라운 시도들과 성취에 감탄했다. 블룸은 바로 스티븐이 찾아 헤매던 정신적 아버지라는 것도 알게 됐다. 그러나 머리만큼 가슴이 이해한 느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후 십수 년이 흐른 지금까지 조이스의 작품들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감각을 느끼고, 지나쳤던 소리들을 들어왔다. 때로는 나의 경험들이 그 작품들을 새롭게 읽게도 하고, 거꾸로 이 새로운 독서가 내 삶을 달리 바라보게도 해줬다. 이와 함께 그의 작품들의 온도가 낯선 차가움에서 따스함으로 바뀌어 왔다. 축적되는 독서로 인해 심신의 통점이 늘어가면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손바닥에 모진 회초리를 맞는 스티븐의 고통이 문득 「애러비」에서 빗줄기가 바늘처럼 보였던 소년의 아픔을 소환한 적도 있다. 그 아픔은 종교와 정치 문제로 갈라지고 가난에 찌든 더블린, 아니 아일랜드의 것이었고, 역사의 부조리함과 부당함에서 오는 고통이었다. 영국 식민통치에 맞선 아일랜드의 고단하고 치열한 싸움 속에서 우리 역사와의 접점을 발견하고 씁쓸한 반가움이 들기도 했다. 예전엔 미처 귀 기울이지 않았던 목소리들, 그러니까 스티븐이 듣고 있는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크리스마스 저녁 식사자리에서마저 살벌하게 터져 나오는 갈등과 반목의 고함소리, 신사, 사제, 건강하고 남자다운 남자, 혹은 진정한 아일랜드인이 되라는 친구들의 조롱과 협박, 부모와 선생의 다그침과 회유의 목소리들. 내겐 부담스러웠던 스티븐의 목소리는 사실 이 시끄러운 수많은 목소리들에 짓눌리지 않으려는 절박한 외침이었다.

‘인문학의 위기’와 더불어 인문계열 학과의 통폐합이 빈번해지고 대학이 취업 준비기관으로 전락하는 현실 속에서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서 새롭게 주목하게 된 대목들이 또 있다. 스티븐은 존경하는 문인을 대라는 친구들의 다그침에, 반항의 아이콘인 영국 낭만주의 시인 바이런과 함께 존 헨리 뉴먼을 꼽는다. 이에 문득 대학원 시절 무턱대고 모았던 책들 가운데 뉴먼의 『The Idea of a University』가 있었다는 기억이 떠올라 책장을 뒤졌다. 400 페이지가 넘는 책인데, 군데군데 읽은 흔적들을 보니 합쳐도 사십 페이지도 안 읽은 것 같다. 아직은 학생이었기에 대학에서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보다는 무엇을 배울 것인가가 더 시급한 문제였기 때문이리라. 어쨌든 뉴먼은 영국 국교회의 사제였다가 1830년대 옥스퍼드 운동을 주도하고 가톨릭으로 개종했다는 점에서, 영국 입장에서 보면 이단아였다. 그는 이후 더블린에 설립된 아일랜드 가톨릭 대학의 학장을 지내면서 대학은 그 어떤 실용적 가치로도 환원되지 않는 학문 그 자체를 위한 학문을 가르쳐야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떠난 후 아일랜드 가톨릭 대학은 유니버시티 칼리지로 개명하고 교육의 자율성을 정부의 보조금과 맞바꿔 점차 실용교육을 강화한다. 이것이 스티븐의 대학시절 상황이다. 스티븐은 뉴먼의 정신에 부합해 학업에 매진하지만 자신의 공부는 현실 속에서 사실상 사냥매를 다루는 기술과 다를 바 없는 것으로 치부된다는 걸 깨닫는다. 영혼의 불꽃이 꺼진 영국인 학감이 아이러니하게도 스티븐에게 불을 피우는 방법을 가르쳐주면서 실용교육의 중요성을 환기하는 장면이 있다. 학감은 스티븐에게 자네는 예술가이니 바라보기에 즐거운 이 불이 아름다운 것인지를 설명해보라고 말한다. 학감의 은근한 비아냥거림을 의식하면서, 스티븐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을 빌려, 불이 따뜻함을 향한 동물적 갈망을 충족시킬 때 심미적으로 아름다울 뿐 아니라 선하다고 답한다.

자신의 정신적, 예술적 해방과 독립을 위해서라면 가족도 친구도 조국도 매몰차게 떠나겠다는 스티븐의 반항에서 온기를 느끼기까지는 제법 오랜 시간이 걸린 것 같다. 그러나 막상 느끼고 나니 그동안 어째서 놓쳤던가가 의아해진다. 작품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따뜻함에 대한 스티븐의 갈구는 곳곳에 배어있다. 수백 년 간 지속된 수탈의 현장에 태어난 스티븐은 그보다 훨씬 더 오랜 기간 동안 축적돼 온 거대한 문화적 유산 앞에 “수줍은 손님”처럼 동경과 소외감을 동시에 느끼며, “따뜻하고” “인간적인” 고전의 책장을 넘긴다. 따뜻함은 뜨거움과 다르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예술가로서의, 아니 한 인간으로서의 진정한 해방은 좌절과 분노, 욕망과 증오의 뜨거움을 적정 온도로 바꾸어낼 때 가능하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스티븐은 자신의 욕망과 분노에 휩쓸리다가도 이내 거기서 빠져나와 자신의 감정과 생각이 온전히 자신의 것인지를 되묻고 바라보는 내적 시선을 확보하려 한다. 진리를 추구하되 이를 대상화하고 거기에 군림하려는 욕망에 빠지지 말 것, 불의에 분노하되 분노 자체를 정당화거나 자신의 올바름을 과신하지 말 것을 다짐하는 스티븐에게 예술은 바로 이러한 다짐을 실천하는 장이 된다. 실제로 그의 예술관의 핵심은, 예술은 그 어떤 방식으로도 타인의 감정과 사유를 특정한 방식으로 유도하거나 지배하려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작가 역시 자신이 만든 피조물들에 자신의 존재를 드리우지 말고 그들이 스스로 살아 움직이도록 내버려둬야 한다고 스티븐은 주장한다.

어린 시절, 자신을 아득한 상공에서 지구를 바라보는 차갑고 창백한 달과 동일시했던 스티븐은 작품의 말미에 이르면 날아오르는 새의 이미지에서 자신의 모습을 본다. 자신의 정체성과 소명을 그리스 신화 속의 명장 다이달로스에서 찾는 것이다. 다이달로스는 자신이 만든 미로에 아들 아카루스와 함께 갇혔다가 날개를 만들어 탈출하는데, 이카루스는 날개를 붙인 밀랍이 녹을 우려가 있으니 태양에 너무 가까이 말라는 아버지의 당부를 잊고 비상에 도취하다 바다에 추락하고 만다. 그러나 스티븐은, 다이달로스 부자와 달리 주변에 드리워진 그물과 함께 날아오른다. 그를 에워싼 그물은 그가 빠져나가야 할 굴레이기도 하지만, 너무 높이 날아 추락하지 않게 붙들어 줄 삶의 무게이기도 하다. 남의 언어(영어)로 된 날개를 달고 자신의 안과 밖에 촘촘히 둘러쳐진 가족과 종교와 조국이라는 그물을 헤치고 날아가기 위해서는 태양과 지구 사이에 놓인 삶의 온기를 머금고 가야하는 것이다. 여기서 문득, 블룸이 다시 떠오른다. 블룸은 아내의 불륜에 온종일 신경이 쏠려 있지만 그의 초조함에는 경박함이 없다. 유태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내는 사람들에게 그는 그들이 저지르는 불의와 폭력을 지적하지만 그의 목소리엔 분노가 없다. 수백 년의 역사를 품은 것만 같은 고단한 하루를 끝낸 스티븐에게 블룸이 건네는 따뜻한 코코아는 삶의 온기를 향한 스티븐의 절박한 갈망을 채워주는, 그 자체로 아름답고 선한 불길이 아닐까.

삽화: 박진희 기자 jinyhere@snu.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