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랑 바르트는 1968년 ‘저자의 죽음’을 선언하며 일약 비평계의 신화로 발돋움했다. 그의 에세이 가운데 아마도 가장 널리 읽혔을 「저자의 죽음」에서 그는 작품에 대한 해석이 저자와 무관하게 성립할 수 있는 길을 텄는데, 이는 저자를 작품 세계의 창조주이자 의미의 기원, 그리고 해석의 최종심급으로 당연시해온 오랜 비평적 전통을 뒤집은 가히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니까 문학작품은 바르트 이후 비로소 저자라는 족쇄에서 해방돼 자유로운 해석을 누리게 됐다고 말하는 것이 과장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마치 시인과 소설가의 비윤리적인 행위에 주어지는 면죄부쯤으로 오인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문단_내_성폭력’이라는 SNS 해시태그 운동과 함께 공론화된 증언들이 이것을 말해주고 있다. 가장 최근 이른바 ‘성폭력 문인 명단’에 이름을 올린 2000년대 ‘미래파’ 기수의 경우, 그의 그런 ‘내력’이 문단에 관계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는 이미 어느 정도 알려져 있었으나 묵인돼 온 것이라고 한다. 놀랍도록 신선하고 강렬한 시편들에 비한다면 시인의 부도덕하고 비윤리적인 행위들은 눈감아줄 수 있는 그저 ‘사소한’ 사생활 문제쯤으로 여겨진 것이리라. 그리하여 문단은 미당문학상과 박인환문학상을 시인에게 수여했다. 그리고 이제는 성폭력의 이력이 뒤따르는 시인을 갖게 됐다.

한편 이번 사건의 가해자로 지목된 시인들의 시집을 여럿 출간해줬던 모 출판사는 비등하는 여론에 못 이겨 발표한 입장서에서 “문학은 문학으로서 평가돼야 한다는 문학의 자율성에 대한 믿음, 그러므로 작가에 대한 평가는 무엇보다도 작품 자체로 이뤄져야 한다는 믿음”을 강조했다. 사태에 대해 출판 관계를 정리하는 등의 책임은 지겠으나, 문학은 오로지 문학으로만, 그러므로 작가 역시 그의 어떤 비윤리적인 행위와 무관하게 작품으로만 평가돼야 한다는 자신들의 오랜 믿음은 무결하다는 식으로 읽히는 대목이었다. 그러나 송승언 시인이 지적한대로, 가해자로 지목된 다수가 바로 그런 믿음을 신봉하는 출판사의 시인선 400번대에 가지런히 이름을 올리고 있다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들이 문학/작품에 부여한 저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지위는 어떤 시인들에게 제자들을 성추행·성폭행하는 데 손쉽게 동원할 수 있는 권력이 됐고, 그 부도덕하고 비윤리적인 행위를 은폐하는 알리바이가 됐다.

다시 바르트로 돌아가서, 「저자의 죽음」은 작품에 대한 해석을 독점하는 저자의 지위를 해체하기 위한 시도였지, 역으로 작품을 특권화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바르트에게 그것은 문학작품을 읽고 쓰는 일에 개입되는 권력 관계를 전복하는 작업이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이곳의 문단에서는 종종 그것을 문학/작품을 신화화·절대화하는 논리로 이용하고, 결국 다시 저자의 권위를 회복시키는 퇴행을 초래하곤 한다. 그리하여 문학은 본래의 익숙했던 권력으로 회귀한다.

어느 가해자 시인은 피해자에게 시 세계를 넓힌다는 구실로 성폭력을 합리화했다고 한다. 그런 이들을 향해 우리는 엄중히 경고해야할 것이다. 문학을 함부로 욕되게 하지 말라. 그러나 동시에 이렇게도 고해야할 것이다. 문학을 함부로 욕되게 하라. 문학/작품을 고결하고 순전한 것으로 숭배하는 이들에게 말이다. 그들로 인해 문학이, 익숙하지 않은, 결코 익숙해져서는 안 되는 권력으로 귀환하는 까닭이다.

배하은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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