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부문 심사평

대학문학상 소설 부문에 응모된 작품은 총 14편이었다. 두 편 이상의 작품을 응모한 이가 있으니 실제로 응모한 이는 여덟 명인 셈이다.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일들이 드라마틱하게 펼쳐지고 있는 현실 때문에 상상이라는 것이 얼마나 왜소한 것인지 새삼 느끼게 되는 나날들이지만, 그래도 여덟이라는 숫자는 너무 적은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과 그리 멀지 않은 날에 여덟이라는 숫자에도 감사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동시에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경험이었다.

14편의 응모작 중에서 당선작을 뽑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응모작들 중에서 소품에 해당할 만한 것과 자신의 생각을 정돈되게 표현하지 못한 몇몇 작품을 빼고 나니, 자연스럽게 두 편이 남게 됐다. 심사과정이 이렇게 쉽게 마무리된 적이 있었던가 하고 되묻고 싶을 만큼 두 사람의 의견은 쉽게 모아졌다.

가작으로 선정한 「섬」은 한밤의 우연한 만남을 통해서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다. 낯선 이의 공간을 방문하면서 겪게 되는 시간들이란 익숙하지 않은 것, 그래서 기괴하다고 여겨왔던 것들과 익숙해지는 과정이다. 그 속에서 ‘남루하고 고독한 공간’을 점유한 채 살아가는 우리 시대의 한 단면이 포착된다. 하지만 토끼를 키우는 사람의 고독하고 우울한 내면이라는 게 익숙한 것이기도 했으며, 담배-술-공포영화-화투로 두 사람 사이의 관계 양상 역시 평면적이라는 느낌이었다.

당선작으로 선정한 「번개가 세상에 주는 붉은 것」은 제목부터 읽는 이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데 성공하고 있었고, 그 호기심들을 하나의 이야기로 조직하는 능력 또한 갖추고 있었다. 할머니, 어머니, 동생으로 이어지는 여성의 삶을 생리라고 하는 모티프로 수렴시켰으며, 세 사람을 바라보는 서술자의 위악적인 심리 또한 충분히 설득력을 갖추고 있었다. 할머니와 함께 지내게 됐을 때 환호성을 지르던 아이가 어떻게 할머니에 대해 따뜻한 연민을 품는 것조차 스스로 금지시켜 나갔는지, 그리고 마지막에는 어떻게 마음의 족쇄에서 풀려나오는지가 흥미롭게 서술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실존적 자기고백을 통한 용서와 치유라는 이야기 본연의 가능성을 달성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붉은색으로 작품 전체의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 또한 높이 살만한 대목이어서 서술 템포를 조절하는 데 미숙했던 점들을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았다고 판단된다.

마지막으로 문학적 열정을 아낌없이 보여준 다른 응모자들에게 수상의 영예를 안겨 드리지 못한 데 대한 미안함과 함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에 대한 젊은 시각을 볼 수 있어서 소설을 읽는 내내 즐거웠음을 덧붙이고자 한다. 소설의 길을 함께 걷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반갑고 고마웠습니다.

김종욱 교수(국어국문학과)

서영채 교수(아시아언어문명학부)

 

시 부문 심사평

올해 대학문학상 시 부문에는 9명이 보낸 37편의 원고가 다였다. 시에 대한 관심의 폭이 옛날같지 않아보여 씁쓸하다. 그러나 양적인 번성만이 좋은 것도 아니다. 시단에 단 한명의 위대한 시인이 있다면 사람들은 행복할 수 있다. 보낸 원고들을 살펴보며 그러한 기대를 하다가 다음 기회로 접어뒀다. 좀 더 기다려보기로 하자.

여덟 편 정도가 어느 정도 시에 대한 창작술이나 주제에 대한 의미있는 탐색의 수준을 보여주었다. 「평원의 서」는 신선하고 놀라운 어법과 이미지들을 제시할 수 있는 재능을 보여준다. 하지만 너무 그러한 것들을 드러내려는 의도가 어색하고 전체의 시적 스토리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지 못했다. 「그대의 아름다움을 박제하고 싶어라」도 그런대로 읽힐만한 시이다. 마치 세련된 모던풍의 시인이 쓴 것 같다. 그러나 ‘추억’과 ‘기억’ 등에 대한 미묘한 관념적 차이들이 시인이 생각한만큼 독자들에게 잘 전달되지 않을 것 같다. 그만큼 주제가 평범하며 더 삶의 울림 속에서 전달되는 감각과 정서를 찾아내야 한다. 「새벽」이란 시도 시를 쓰는 방식을 잘 아는 사람의 작품이다. “방이 있으면 네모의 외로움이 느껴진다” 같은 구절들이 그렇다. 그러나 여기 전체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개’의 상징성이 미약하다. 개를 데려와 눕는 방 이야기는 윤동주의 「또다른 고향」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시인이 추구해야 할 강렬한 삶의 방향이 모색되지 않으면 이러한 것들이 단지 기교처럼 느껴지게 된다. 이 시인의 「할머니」도 시적으로는 세련돼 보이지만 여전히 삶의 강렬도를 더 필요로 한다.

「장독」과 「귀로」를 읽어본다. 「장독」은 짧지만 군더더기 없이 말끔하게 정리된 항아리 이야기이다. “입 좁은 항아리 가쁜 숨 쉰다”라는 첫 구절이 좋다. 막 일부러 화려하게 보이려 한 것도 아니고, 항아리에 생명성을 불어넣어 그 배불룩할 것 같은 항아리 이미지에 매우 잘 들어맞는 이야기를 하나 만들어냈다. 아마도 처음 시를 쓰려는 사람들은 일부러 과시하지 않으면서 이렇게 딱 들어맞는 표현과 주제가 자연스러운 말들과 만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는 공부가 필요하지 않을까? 「귀로」는 그러나 기교가 너무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서 시의 순수한 맛을 흔들어버렸다. 「장독」의 시인의 발전을 바라면서 이 시를 가작으로 정했다.

「착석」 「따뜻한 방」 「배회공간」 등 세 편이 모두 어느 정도 이상의 수준을 달성한 것으로 생각되는 오석화 군을 이번 심사에서 주목하게 됐다. 이 세 편 모두 시적인 주제와 표현의 달성도가 다른 응모자들에 비해 높았다. 그 중에서도 「따뜻한 방」을 당선작으로 하는 것에 심사위원들의 의견이 일치했다. 응모작 가운데 가장 긴 장시인데 서사적인 스토리가 적절하게 굴곡을 이루며 전개되고 비약하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도록 했다. 북국의 시계공 발트 씨 이야기인데 마치 카프카의 이야기나 쥐스킨트의 이야기를 한 대목 따와 변형시켰을 것 같은 분위기도 느껴진다. 다만 아쉬운 것은 그 먼나라 이야기를 우리의 현실 이야기와 더 강력하게 엮을만한 알레고리적 장치가 잘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뜻한 방과 북국의 추위라는 대비법에 우리 현실의 추위와 따뜻함의 어떤 분위기들을 더 강렬한 양념으로 발트 씨 이야기에 가미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발트 씨 이야기는 어떠한 권력에 대해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에 맞서며, 다만 자신의 작은 일을 위대하게 아름답게 만들어나가기 위해 매우 개성적으로 영웅적인 삶을 사는 모든 존재에 대한 찬미이다. 이 이야기를 더 자연스럽고 더 명쾌하게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아쉬움을 전해야 할 것 같다.

신범순 교수(국어국문학과)

장경렬 교수(영어영문학과)

 

영화평론 부문 심사평

이 글에는 서로 연관된 몇 가지 약점이 있다.

첫째, 이야기에 관심이 집중돼 있다는 것이다. 영화의 시청각적 요소들은 이야기를 잘 전달하기 위한 도구에 머물지 않는다. 좋은 영화는 이야기로 환원될 수 없는 이미지와 소리를 내장하고 있다. 이 글은 그런 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둘째,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 요소들로 영화를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우주선에 홀로 남은 주인공은 무전기로 들려오는 목소리와 개의 소리의 내력에 대해선 알지 못하고, 관객 역시 알지 못한다. 중요한 점은 그 소리들의 질감과 톤이라는 물질성이다. 그 물질성에 대해 더 유의했으면 좋았겠다.

셋째, 그런 이유로 이 글은 평론이라기보다 해설에 가깝다. 평론은 작품이 우리의 지식으로 해명할 수 없으나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지점까지 갔는지 여부를, 혹은 작품이 우리의 지식으로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얼마나 치열하게 제기했는지를 탐색하는 글이다.

하지만 장점도 있다. 첫째, 문장이 간결하지만 단단하고 정연하다는 점이다. 이것은 글 쓰는 이에게 필요한 좋은 자질이다. 둘째, 해설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지만 그럼에도 성실하고 치밀하다는 점이다. 성실하고 치밀한 글쟁이는 오늘보다 내일 더 좋을 글을 쓸 수 있다.

요컨대, 이 글 자체의 성취가 아니라 글쓴이가 지닌 자질과 태도가 그의 또 다른 글을 읽어보고 싶게 만들었고, 그의 내일을 궁금하게 만들었다. 세속적 보상을 기대하기 힘든, 그리고 점점 사람들의 관심이 줄어가고 있는 영화평론에, 글쓴이가 더 많은 고민과 노력을 기울여주기를 선배로서 소망하며 이 글을 가작으로 뽑는다.

허문영 영화평론가

 

희곡·시나리오 부문 심사평

시나리오 부문에는 한 명의 응모자가 두 편을 투고했다. 비교로 삼을 대상이 없는데다가 원고 분량마저 권장된 기준에 못 미쳐 난감했지만, 그렇다고 바로 제쳐버리기엔 투고작의 영화적 감수성이 눈에 밟혔다.

「죽은 아버지」는 영화라는 예술 형식이 단지 연극을 카메라로 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의 시나리오이다. 인물들의 대사는 짧지만 이들이 처한 상황과 서로간의 관계를 경제적으로 함축하고 있으며, 적절한 음향(예컨대, 전반부의 물소리), 화면 구성(예컨대, 각각 침실과 화장실에 고립된 채 대화를 주고받는 재운과 혜주), 그리고 말없는 행동들이 대사에서 미처 이야기되지 않은 것들을 영화적인 내러티브로 구축하고 있다. 재운은 집을 나가 새살림을 차린 자기 아버지의 행태를 반복하고 있으며, 마지막 장면에서 장롱 속 재운을 바라보는 아들의 묘한 시선은 그것이 다음 세대로 유전될 것임을 정확히 예고해준다. ‘운명의 유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런 플롯이 딱히 새로워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작자가 이 플롯이 영화적 장치들을 ‘연습’하기 위한 도구임을 명확히 자각하고 있는 것 같아서 흥미로웠다. 침실 스탠드를 껐다, 켰다 하는 혜주의 행동, 장례식에서의 소란 등 다소 상투적인 장면이 눈에 띄지만, 작자의 영화문법 ‘연습’은 대체로 성공적이다. 대사가 거의 없이 진행되는 후반부의 시퀀스는 날렵하고, 불륜 드라마의 클리셰로 사용되는 장롱 유머를 모종의 메타포로 승화시킨 감각도 멋지지만 하나의 작품이 되기에는 여전히 소략하다.

크로키는 화가의 자질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그러나 크로키만 가지고 그가 어떤 진짜 그림을 그리게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기에 심사자의 판단은 이쯤에서 멈춰야 될 것 같다.

박현섭 교수(노어노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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