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 | 윤이상 탄생 100주년

죽어서도 블랙리스트에 올라간 작곡가 윤이상. 클래식계의 3대 오케스트라 중 하나로 꼽히는 베를린필하모닉오케스트라에서도 그의 곡들로 구성해 기획 연주회를 열만큼 윤이상은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 작곡가다. 그러나 전 정부의 이른바 문화계 ‘블랙리스트’에는 ‘윤이상평화재단이’ 명시돼 있었으며, 고 김영한 전 민정수석의 청와대 업무일지에도 ‘윤이상 訪北(방북)’이라고 적혀있었다. ‘상처 입은 용’이라는 그의 별명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의 인생은 굴곡으로 점철됐다. 줄곧 정치적 이념 논란에 휩싸였고 그토록 그리워하던 고향 땅을 밟지 못한 채 타지에서 타계한 윤이상. 그가 올해 탄생한 지 100주년을 맞이했다. 이에 『대학신문』에서는 천재와 비운의 작곡가, 민족주의와 친북이라는 상반된 수식어로 얼룩진 그의 발자취를 다시 되짚어본다.

 

현대음악에 아시아를 담은 작곡가

19세기 말 서양문물과 함께 한반도에 양악이 유입됐다. 양악은 기독교 전파를 토대로 안익태, 홍난파, 윤극영 등에 의해 본격적으로 수용됐다. 안익태는 ‘애국가’(1936)를 작곡했고, 홍난파는 ‘한국 가곡의 아버지’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가곡을 작곡해 양악의 도입과 보급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 그러나 한반도에 양악이라는 새로운 지평을 연 이들에 대해 일각에선 기초가 제대로 쌓이지 않은 상태에서 무조건으로 양악을 수용해 음악적으로 미흡한 노래가 만들어졌다는 비판이 있다. 작곡가 신지수 씨는 “홍난파의 ‘고향생각’(1939)의 경우 서양 박자 체계로 볼 때 기형적이며, 애국가의 경우에도 가사에 맞는 적절한 선율로 작곡되지 않았다”며 “이런 현상은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던 개화기 시절에 팽배했던 서양 우월주의 인식 때문에 제대로 된 이해 없이 ‘우선’ 수용됐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반면 비슷한 시기에 근대 양악을 접한 윤이상은 이후 현대음악까지 공부하며 작곡가로서의 스펙트럼을 넓혀갔다. 독학으로 14세에 작곡을 시작한 그는 통영과 서울의 음악 교습소를 거쳐 1935년 일본 오사카 음악학교로 유학해 본격적인 양악 공부를 시작했다. 그는 대표적 초기 작품인 가곡 ‘고풍의상’(1950)에서 서양식 음악 기법에 충실하면서, 동시에 전통음악의 음계인 계면조*나 평조*를 사용하고 국악 장단을 적용했다. 이후 1956년 유럽으로 유학을 가 현대음악을 접하면서 윤이상의 음악적 어법은 조성이 없고 기존 리듬체계가 파괴된 형식의 무조성 현대음악으로 바뀌었다. 김승근 교수(국악과)는 “윤이상은 39살에 유럽으로 이주하게 되는데, 유럽 이주 전과 이주 후의 음악적 색채가 다르다”며 “유럽에 가기 전 한국에서 작곡한 곡들은 양악의 기본적인 틀에 한국적인 소재와 한국장단을 대입한 곡들이 많았으나 유럽에서 공부한 후엔 현대음악으로 어법이 바뀌었다”고 설명했다. 이때 작곡된 대표적인 곡은 궁중의례를 모티브로 한 ‘예악’(1966)으로, 윤이상은 이 작품으로 현대음악의 역사적 반열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60여 년에 걸친 윤이상의 음악사를 관통하는 공통된 정서는 ‘동양적 색채’에 있다. 김승근 교수는 “고향인 통영은 그의 음악적 재료의 원천이 되는 곳으로, 일제강점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유랑극단의 가무극, 오광대놀이, 잔칫집에서 울리는 풍악 등 한국의 전통음악이 마을에 가득했다”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궁중음악부터 민속악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의 국악 속에 녹아든 도교와 음양 철학 등 동아시아적 재료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이런 경험들은 모두 윤이상의 음악적 영감이 돼 훗날 그의 작품에 스며들었다. 윤신향 강사(베를린 훔불트대 융합젠더연구소)는 “윤이상의 ‘밤이여 나뉘어라’(1980)는 그가 경험한 무속 의식이 음향적으로 재현된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의 또 다른 대표곡으로는 동양적 악기의 음향을 표상으로 작곡한 ‘교착적 음향’(1961)과 동아시아 음악의 장식음적 특성을 시종일관 소음화한 ‘유동’(1964) 등이 있다.

 

한국을 작곡하고 싶었던 작곡가, 한국에서 추방되다

윤이상은 서양문명의 흐름 속에 동양사상을 담은 유일무이한 세계적 작곡가가 됐지만, 고국에선 정치적 금기의 대상으로 빈번히 오르내리며 그의 음악은 오랫동안 국내에서 접하기 힘들었다. 1967년 ‘동백림(동베를린) 간첩단 사건’(동백림사건)에 연루된 윤이상에게 ‘빨갱이’ 낙인이 찍혔기 때문이다. 동백림사건과 윤이상의 악연은 1963년, 윤이상이 동베를린 북한 대사관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게 되면서 시작됐다. 통화 내용은 죽마고우인 최상환을 만나게 해주고, 도교에 관심이 많았던 그에게 사신도를 보여준다는 이유로 북한에 초청한다는 것이었다. 제안을 받아들인 그는 그해 겨울, 평양에 도착해 약속대로 사신도가 있는 강서대묘를 방문했고 훗날 이 경험을 영감으로 ‘영상’(1968)을 작곡했다. 하지만 이날의 북한 방문은 1967년 박정희 정부가 윤이상을 국가보안법으로 옭아맨 계기가 됐다. 윤이상은 1심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고, 이후 10년으로 감형됐으나 수감 중 가혹한 고문으로 자살을 기도하기까지 했다. 2년간의 옥고를 치르던 중인 1969년, 그는 스트라빈스키와 카라얀과 같은 동료예술가들의 탄원서와 독일 정부의 외교적 압력 덕분에 마침내 풀려나 독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윤이상은 타계할 때까지 고국의 땅을 밟을 수 없게 됐으며 국내에서 그의 음악 연주가 금지됐다.

학계에선 윤이상의 일생에 전환점이 된 동백림사건을 기점으로 그의 음악적 양식이 변화했다는 해석도 제기된다. 홍은미 강사(한국예술종합학교 작곡과)는 “인류애적 메시지 전달이 용이하도록 양식적으로 좀 더 유연한 음악을 추구하기 시작했다”며 “청중의 대상을 대중까지 확장하면서 이전의 복잡하고 어려운 음악 구조가 차츰 완화돼 화성이 보다 부드럽고 명료하게 처리됐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동백림사건을 겪은 뒤 작곡된 바이올린 독주곡 ‘대왕의 주제’(1976)는 바흐의 음악을 의식적으로 수용하며 대중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작곡됐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의 작품엔 사회참여적 태도가 한층 짙어지기도 했다. 1980년 광주에서 발생한 민주화 투쟁이 모티브가 된 ‘광주여 영원히’(1981)에선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격렬한 표현을 통해 인류 전체에 폭력의 비애를 경고한다. 전의 작품에선 볼 수 없었던 사회참여적 메세지를 담기 시작한 것이다. 윤이상과 독일의 소설가 루이제 린저의 대담을 엮은 책 『상처 입은 용』에서 윤이상은 칸타타(교성곡) ‘광주여 영원히’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 교성곡을 1987년 2월과 3월 2개월 동안에 완성하였다. 언젠가 나는 한 번 민족을 위한, 우리 민족의 가슴에 영원히 안겨주는 곡을 쓰고 싶었다. 이 곡은 나의 량심에서 참을 수 없어 터져나온 곡이다. 이것으로써 ‘광주여 영원히’와 함께 나는 작곡가로서 우리 민족에게 바치는 나의 절절한 호소와 충정을 표시한 것이다”

 

1987년 북한국립교향악단이 초연한 칸타타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1987)도 그 연장선에 있다. 이 곡은 우리 민족의 간절한 소원인 통일을 노래하는 대서사시로 민요풍의 곡을 붙여 누구나 쉽게 부를 수 있도록 만든 곡이다.

 

고국으로 돌아온 그의 음악

이념 논란으로 얼룩진 윤이상의 누명은 그가 타계한 이후에 벗겨졌다. 1994년 그의 음악이 해금된 것을 계기로 귀국을 추진했으나, 한국 정부가 공식사과와 각서를 요구하며 귀국이 무산됐고 윤이상은 그토록 그리운 고향 땅을 밟지 못한 채 이듬해 타계했다. 그가 타계한 후 2006년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 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에 의해 정부가 무리하게 간첩죄를 적용했으며 조사과정에서 가혹 행위가 있었음이 공식적으로 밝혀졌다.

비록 윤이상은 고국이 아닌 타지에서 죽음을 맞이했지만, 그의 음악적 유산은 한국에서 재조명됐다. 동아시아적 재료를 사용하고 한국 전통악기의 음색을 서양악기로 옮겨 표현하는 등 윤이상이 사용한 독특한 기법은 당대 아시아 작곡가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작업이었다. 김승근 교수는 “‘플루트 독주를 위한 연습곡’(1974)에서 사용된 ‘주요음 기법’은 한 음을 중심으로 꾸밈음이 부가돼 한국의 전통음악 ‘청성곡’을 연상케 한다”고 설명했다. 주요음 기법에선 한국의 전통음악과 유사한 원리로 유연하게 흐르듯이 선율이 변화하며, 이때 장식음*, 트릴*, 글리산도* 등의 서양음악 어법이 사용된다. 주요음 기법을 통해 국악기 특유의 떨림을 서양악기로 재현한 것이다. 김 교수는 “이는 동아시아의 음악양식이 윤이상에 의해 당대의 유럽 사정에 맞게 ‘번역’된 결과”라고 말했다. 그가 남긴 음악적 유산은 국내보다 해외에서 먼저 인정 받았다. 동양의 기법과 서양의 음악적 어법을 결합시켜 독특한 질감을 표현한 윤이상의 음악은 유럽 전역에서 높은 평가를 받게 되고, 윤이상의 이름 또한 유럽 현대음악사의 주요 작곡가 반열에 이름을 올리게 됐다.

그의 음악적 유산이 재조명 되면서 그를 기리는 움직임이 통영을 중심으로 일고 있다. 2002년도부터 윤이상의 고향인 통영에서 그를 기리기 위해 시작된 ‘통영국제음악제’는 현재 세계적인 음악제로 발돋움 했다. 김승근 교수는 “통영국제음악제는 정치적 사건으로 조명 받지 못한 윤이상의 음악적 성취를 기리는 것에 의의가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윤이상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2005년 설립된 ‘윤이상평화재단’은 정권이 바뀌면서 정부 지원과 기업 후원금이 끊겼다. 그동안 보수단체 등에서 윤이상을 친북으로 모는 바람에 지원이 끊겨 거의 파산 지경에 내몰린 것이다. 윤이상평화재단 탁무권 이사장은 “작년 윤이상 탄생 100주년을 앞두고 이사진을 다시 꾸리면서 재출범의 각오로 재단 재건에 온 힘을 쏟고 있다”고 말했다.

 

윤이상이 개척한 한국 현대음악의 길은 후대 작곡가들에게 ‘현대 음악 세계를 보게 해주는 창문’과 같은 존재다. 김창욱 음악평론가는 “윤이상의 음악은 동아시아 음악 전통에 뿌리를 두면서도 끊임없이 다원성을 지향하는 열린 음악관에서 기인한다”며 “민족과 인류 그리고 세계의 평화를 모색한 윤이상의 세계관 역시 궤도를 같이한다”고 말했다. 그의 후기 음악의 기저에는 한쪽의 이념이 아닌 폭력과 불의에 고통받는 인류에 대한 위로가 있다. 그를 기리는 통영국제음악제가 매년 봄마다 통영에서 열리며, 지난 4월 8,9일 윤이상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음악제가 개최됐다. 생전에도 온갖 누명과 논란에 타지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죽어서도 그 누명을 오래도록 벗지 못한 작곡가. 이제 그의 음악에도 봄이 올 때가 됐다. 

 

*계면조: 남도 민요에 주로 나타나는 한국 전통 음계

*평조: 경기 민요에 주로 나타나는 한국 전통 음계

*장식음: 선율을 꾸미거나 변화를 주는데 주로 사용되는 음표

*트릴: 장식음의 한 종류로 2도 위의 음을 빠르게 반복하며 특정 음을 꾸민다.

*글리산도: 높이가 다른 두 음 사이를 미끄러지듯이 연주하는 방법

 

삽화: 이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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