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취재 | 고시촌에 영화관이 생겼다

고시학원들이 즐비한 대학동 녹두거리. 거리 안쪽으로 들어가면 밤낮을 모르는 술집들 사이로 지친 기색이 역력한 대학생들과 고시생들이 바쁘게 제 갈 길을 가고 있다. ‘핸들이 고장 난 8톤 트럭’처럼 쉴 새 없이 바쁜 생활에서 그들은 잠시 브레이크를 밟고 쉬어갈 곳이 필요해 보인다. 바로 이곳에 그들의 ‘땡땡이’를 기다리는 공간이 있다. 삶에 지쳐 자체 휴강을 선언한 이들의 휴식처, ‘자체휴강 시네마’를 다녀왔다.

대학동 녹두거리에 있는 자체휴강 시네마.
계단을 타고 내려가면 보이는 상영관에선 영화가 상영되고 있다.

지친 일상 속의 오아시스, 자체휴강 시네마

‘쉴 곳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한 영화관’을 만들고 싶었던 박래경 대표(30)의 노력으로 지난 2월, 대학동의 낡은 건물 지하 1층에서 자체휴강 시네마가 탄생했다. 소설가의 꿈을 키워가다가 영화 시나리오를 접하면서 직접 영화를 제작하기도 할 만큼 단편 영화의 매력에 푹 빠졌던 그는 이런 작품들이 좁고 사적인 공간에서만 상영되는 것에 아쉬움을 느꼈다. 박 대표는 “멀티플렉스에선 볼 수 없는 단편 영화들의 공간이 하나쯤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며 직접 영화관을 만들고자 결심한 계기를 밝혔다. 이런 영화가 필요한 사람들이 누굴까 고민하던 그는 대학생, 고시생, 그리고 직장인들이 치열하게 살아가는 대학동에 휴식공간과 같은 자체휴강 시네마를 열게 됐다.

자체휴강 시네마의 문을 열고 지하 계단을 내려가면 단 한 개의 상영관이 있다. 8개 남짓의 좌석이 마련된 강의실만 한 상영관에선 개성이 가득한 단편 영화들이 상영된다. 상영되는 영화는 매달 소형 독립 배급사 또는 영화감독들로부터 배급받은 단편 영화들 중에서 장르와 작품 분위기, 주제 등의 다양성을 고려해 네 편에서 다섯 편 정도를 선정한 것이다. 고정 상영표가 없기 때문에 관객이 오면 영화를 고를 수 있도록 박 대표가 직접 상영작들에 대해 꼼꼼히 설명해주고, 관객이 한 명뿐이더라도 영화 상영을 시작한다. 5월 현재 영화관에선 <여름의 끝자락>(곽새미, 박용재 감독) <동물원> (김세현 감독) <오명>(김의석 감독) <겨울꿈>(김태진 감독) <관계없는 우주>(김재영 감독)가 상영되고 있으며, 자체휴강 시네마의 페이스북 페이지를 통해 매달 신작과 기타 이벤트 등이 공지된다.

단편 영화와 관객의 만남이 이뤄지는 곳

단편 영화를 상설 상영하는 공간은 전국에서 네 군데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에 자체휴강 시네마는 단편 영화와 관객의 만남을 ‘상시’ 주선해주는 특별한 공간이다. 박 대표는 “단편 영화는 대학생의 졸업 작품에서부터 유명 감독의 하드디스크 속에 숨겨져 있던 작품까지 굉장히 다양하다”며 “이렇게 연출자의 스펙트럼이 넓다 보니 영화마다 개성 있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단편 영화의 매력에 대해 설명했다.

이런 매력에도 불구하고 주목받지 못하는 좋은 작품들을 관객에게 소개시켜줄 기회를 만들고자 지난 3월 자체휴강 시네마는 단편 영화관 ‘일시정지 시네마’ ‘극장판’과 함께 ‘2017 봄 상영작 공모전’을 진행하기도 했다. 박 대표는 “영화관 운영이 안정되면 자체휴강 시네마에서 자체적으로 정기공모전을 개최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뿐만 아니라 자체휴강 시네마는 앞으로 고정 상영시간표를 만들어 매달 바뀌는 상영작 외에도 영화제 수상작, 고시촌 영화제 출품작 등을 함께 선보일 예정이다.

매력 있는 단편 영화들을 소개하고자 시작된 영화관답게, 자체휴강 시네마는 영화를 사랑하는 관객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있다. 영화관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필름 모양의 상단 벽지에는 관객들이 붙인 포스트잇이 빼곡하다. 포스트잇은 귀여운 그림들과 자체휴강 시네마에서의 소중한 경험을 추억하려는 문구들로 가득 차 있다. 뿐만 아니라 지난 3월부터 ‘단데기’라는 영화 감상 모임을 꾸려 매주 수요일마다 단편 영화 등의 작품을 감상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활동도 진행 중이다. 박 대표는 “대학생, 영화나 음악 분야의 일을 하는 직장인, 구직 중이거나 일을 쉬고 있는 사람 등 모임의 구성원이 매우 다양하다”며 “매주 모여 이들과 함께 영화를 감상하며 친목을 다지고 있다”고 전했다.

커피 한 잔 값의 감상과 휴식

영화는 한 편당 2천 원, 음료도 한 잔당 2천 원 남짓한 부담 없는 금액이기 때문에 이곳은 형편이 여유롭지 않은 학생들, 고시생들, 또는 직장인들을 위한 최적의 문화 휴식 공간이 된다. 박 대표는 “프랜차이즈 카페의 커피 한 잔 값을 생각해서 이렇게 가격을 매기게 됐다”며 “카페에서 쉬는 것처럼 이곳도 편히 쉬어가는 공간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고 말했다. 짧은 시간이라도 지친 이들의 휴식처가 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 자체휴강 시네마의 취지기 때문에 영화관 내부는 아늑한 거실처럼 꾸며져 있다. 박 대표는 “실제로 몇몇 학생들은 자체 휴강을 하고 와서 영화를 보고 가기도 한다”며 “수험 생활에 지친 기색이 역력한 고시생들이 잠시나마 영화 감상을 통해 즐거움을 얻는 것을 보며 보람을 느낀다”고 웃으며 말했다. 자체휴강 시네마에 처음으로 방문했다는 대학생 모명석 씨(24)는 “다른 영화관보다 부담 없이 영화를 즐길 수 있는 점이 좋았다”며 “가끔 답답할 때마다 자체 휴강을 하고 찾아오고 싶을 것 같다”고 말했다. 녹두거리에서 자취를 하면서 우연히 이곳을 알게 됐다는 이주은 씨(경제학부·13)는 “아늑한 분위기에서 신선한 내용의 영화를 접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라며 “앞으로도 자체휴강 시네마를 자주 이용할 것”이라고 전했다.

박래경 대표는 “자체휴강 시네마의 ‘독특함’이 사람들을 끌어당기기도 하지만 그 낯섦으로 인해 사람들이 이곳을 방문하는 것을 망설이기도 한다”고 말했다. 낡은 빌딩 옆, 문 한 칸 너비의 입구에서 바로 지하 계단을 타고 내려가면 있는 자체휴강 시네마는 실로 녹두거리에서 찾아보기 힘든 이색적인 공간이다. 그러나 이런 색다름과 낯섦은 관객들이 지친 일상을 잠시 잊게 하고, 단편 영화를 감상할 때만큼은 바쁜 일상에 잠시 브레이크를 걸어 ‘한숨’ 돌리게 한다. 하루쯤 지친 일상으로부터 땡땡이치고 싶다면 이곳, 자체휴강 시네마에서 자체 휴강을 즐겨보는 것이 어떨까.

사진: 정유진 기자 tukatuka13@snu.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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