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용구 교수 회고록 출간기념 연주회

 
▲ © 강정호 기자

 

강동석 김영욱 정경화 등 세계적으로 내로라하는 제자들을 길러내 한국을 바이올린 강국으로 만든 재미 바이올리니스트 안용구 교수(77)가 모교를 찾았다.

 

11일(월) 음대 예술관에서 연주회 ‘안용구와 평화를 사랑하는 친구들’이 열렸다. 지난 9일(토) 경기도 파주 통일동산에서도 열렸던 이 연주회는 올 9월 출간된 안 교수의 회고록 『한마리 새가 되어』 출간 기념 음악회였다. 서울대 음대 교수시절 제자였던 바이올리니스트 김민 교수(현 음대 학장)와 첼리스트 이종영 교수(경희대겴슈? 등 정상의 음악가 6인과 함께 한 그는 “통일을 바라는 염원을 담아 연주회를 준비했다”고 말했다.

 

그는 경성음악전문학교 1회 입학생이자 6?5전쟁 이후 독일로 유학간 최초의 음악가다. 1959년 유학에서 돌아와 모교 교수가 된 그는 스승으로서, 연주가로서 9년 동안 국내 음악계에서 버팀목 역할을 했다. 새로운 레퍼토리의 연주로 항상 주목을 받았던 그는 ‘안용구현악합주단’ 등을 만들어 국내 실내악 운동을 주도했다.

 

1967년 미국 피바디 음대는 국내외에서 탁월한 바이올린 지도교수로 인정받던 그를 정식 음악교수로 초빙했다. 교수이자 연주자로서 남부러울 것 없는 명성과 지위를 누리던 그는 고민 끝에 한국을 떠났다.

 

“세 가지 이유가 있었죠. 나를 인정하지 않던 아버지와의 갈등, 자유로운 예술 활동을 금지하는 박정희 정권, 나를 시기했던 한국 음악계 때문이었습니다”

 

일례로 바이올리니스트인 그는 한때 첼로를 가르치기도 했다. 그의 지도를 받은 한 학생이 동아 콩쿠르 첼로부문에서 일등을 하자 첼로 전공자들이 “바이올린 하는 놈이 어떻게 첼로를 아냐”며 들고 일어났다. 당시 장래가 촉망되던 학생들 중 대부분이 그의 제자라는 사실은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 그 사건 이후로 제자들이 콩쿠르에 나가기만 하면 줄줄이 떨어지는 등 그는 국내 음악계에서 따돌림을 받았다. 각종 음악경연대회와 입학시험에서 벌어지는 돈거래는 그를 더욱 실망시켰다.

 

1968년부터 34년간 피바디 음대에서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그는 한국의 민주화와 통일에 대한 열망을 가지게 된다. 그는 1975년 언론 탄압으로 폐간위기에 놓인 동아일보를 후원하는 음악회를 열어 당시 한국정부가 반체제인사로 분류하기도 했다. 또 그는 “정치 이념이 다른 중국 유학생과 대만 유학생이 형제애를 발휘해 서로 돕고 사는 것을 볼 때 존경스럽기까지 했다”며 “세계 공통어인 음악으로 남북간 대화의 문을 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시민이 된 후 작곡가 윤이상씨와 교류하며 1980년 이후에는 북한을 네 차례 방문해 평양축전과 범민족음악회에 참석했다. 또 미국에서 1989년에는 ‘분단을 넘어선 우리가곡의 밤’을, 2002년에는 ‘통일의 문을 여는 음악회’를 열기도 했다.

 

“미국에 살면서 조국과 민족이 무엇인지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며 음악가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그는 통일의 그날을 위해 다시 활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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