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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목과 광기, 체험으로 경험하라[리뷰 한 편] 인디게임 ‘슈라우디드 아일’ 리뷰
  • 대학신문
  • 승인 2017.09.03 08:21
  • 수정 2017.09.03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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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혁
게임칼럼니스트

‘닫힌 사회’ 모티브, 게임이 다루다
이른바 ‘닫힌 사회’를 모티브로 삼는 여러 창작물은 일종의 사회적 실험실로 쓰이곤 한다. 내적 변인이 적을 수밖에 없는 소수로 이뤄진 집단이 외부와의 교류마저 끊어진 상태가 됨에 따라 빚어지는 일들은 대체로 인간의 본성에 내재한 섬뜩한 면들을 끄집어내곤 했다. 소설 『파리대왕』의 섬이 그랬고, 만화 「이끼」의 시골마을이 그랬다.

닫힌다는 말의 함의는 그저 물리적인 폐쇄에 머무르지는 않을 것이다. ‘닫힌 사회’를 모티브로 한 콘텐츠들에서 공통으로 만나볼 수 있는 맹목과 광기는 도시 한복판에서도 횡행하는 사이비 종교 모임의 존재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비단 오프라인 현실뿐 아니라, 올해 초 뉴스를 장식했던 ‘안예모(안전한 예방접종을 위한 모임)’의 백신 거부 사태처럼 폐쇄로 인한 맹목성은 온라인 커뮤니티의 형태로 존재하기도 한다.

모든 것이 연결된다는 네트워크 시대에도 닫힌 사회의 광기가 존재한다는 것은 이것이 어떤 기술이나 제도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인간의 본성에 내재한 무언가로부터 비롯된다는 사실을 가리킨다고 봐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렇기에 시대와 기술이 변해도 여전히 닫힌 사회 모티브의 콘텐츠는 끊임없이 생산되고, 또 널리 읽힌다. 이는 기술적으로 가장 첨단에 서 있는 컴퓨터게임의 영역에서도 다르지 않다.

2017 부산 인디게임 페스티벌(BIC2017)의 선정작으로 등장한 PC 기반 인디 게임 ‘슈라우디드 아일(Shrouded Isle)’은 닫힌 사회를 다루는 여러 게임 중에서도 가장 최신작이며, 또 닫힌 사회의 문제를 굉장히 정면으로 다룬 작품이다. 캐나다의 독립스튜디오에서 만들어진 ‘슈라우디드 아일’은 이름 그대로 장막에 싸여있는 이름 모를 외딴 섬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맹목과 광기를 주제로 삼는다.

인디 게임 '슈라우디드 아일'의 타이틀 화면. 인디 게임이기에 화려하진 않지만, 게임이 품은 메시지는 심오하다. 사진제공: 이경혁 게임 칼럼니스트

계절마다 한 명, 사람을 희생해 3년을 버텨라
‘슈라우디드 아일’은 프롤로그를 간단하게 정리하며 시작한다. 게임 시작으로부터 정확히 497년 전, 인간은 소수의 사람들을 빼고는 모두 멸망했다. 대멸망으로부터 500년이 되는 심판의 해까지 플레이어는 생존자들이 모여 있는 작은 섬의 대제사장으로서 신을 섬기며 심판의 재림을 기다리며 버텨야 한다.

게임 속에서 신을 섬긴다는 것은 단순한 신앙생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주어진 3년의 시간 동안 신은 매 계절, 다시 말해 일 년에 네 번 죄인을 찾아 희생제를 지낼 것을 요구한다. 3년을 버티기 위해선 플레이어가 총 열두 명의 마을 사람을 죽여야 하는 것이다. 열두 명은 결코 작은 숫자가 아니다. 이 섬의 가구 수는 총 다섯 가구뿐이며, 한 가구당 6명의 인원인지라 12명은 전체 마을 30명의 거의 40%에 육박한다.

게임은 매 달을 한 턴으로 삼아 진행된다. 플레이어는 다섯 가구에서 한 명씩을 선택해 업무를 지시하며 그 과정에서 대상자가 신앙생활에 얼마나 적합한지, 어떤 죄를 짓고 있는지를 찾아내야 한다. 세 달이 지나 한 계절이 끝날 때가 돌아오면 플레이어는 5명의 대상자 중 한 명을 지정해 희생의 제물로 살해해야 한다. 게임은 살해하지 않는다는 선택지를 주지 않기 때문에 게임을 끝내기 위해선 총 열 두 명을 살해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제사장이라고 희생자를 마음대로 고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A 가문의 한 사람을 희생자로 선택하면 그 가문은 대제사장에 대해 불만을 품게 되며,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가문의 반란으로 게임 오버가 뜨기 때문이다. 가장 낮은 불만을 유지하면서 희생자를 지명하기 위해 플레이어는 대상자의 죄목을 밝혀내야 한다.

게임은 각 개인에게 종교에 긍정적인 속성 하나와 부정적인 속성 하나를 부여한다. 속성은 처음에는 감춰져 있으나 매달 대상자가 돼 과업을 수행하면서 속성이 점차 밝혀지게 된다. 대죄, 중죄, 소죄의 3단계로 구성된 부정적 속성은 해당 캐릭터를 희생자로 지목할 때 사람들의 불만 정도를 가르는 척도로 작용한다. 예를 들어 사소한 죄만이 밝혀진 캐릭터를 희생시킬 경우, 희생자의 가문이 크게 반발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다른 가문까지도 동요할 수 있다. 아예 죄가 밝혀지지 않은 캐릭터를 희생시킬 때는 더 큰 파급효과가 일어난다.

이러한 게임의 구조는 생각보다 복잡한 난이도를 만들며 플레이어의 3년을 끝까지 긴장하게 만든다. 각 가문의 만족도를 맞추면서 동시에 적절한 죄인을 찾아내야 하고, 간간이 플레이어의 꿈을 통해 내려지는 신탁으로 지정된 죄인도 맞춤형으로 희생시켜야 하기 때문에 ‘슈라우디드 아일’의 긴장감은 엔딩까지 팽팽하게 이어진다.

인간이 아닌 신 자신을 위한 덕목
‘슈라우디드 아일’에서 죄는 지금의 우리가 이해하는 방식이 아닌 중세스러운 신앙의 기준에서 분류되는 도덕률에 따른 죄다. 신앙에 반하는 것만이 죄인 것이다. 게임 속 죄에는 사기, 도벽 같은 이해 가능한 수준의 것들도 있지만 당최 이해가 어려운 죄목들도 존재한다. 죄의 기준인 신앙이 요구하는 덕목 자체가 충격적이기 때문이다.

‘슈라우디드 아일’의 마을을 지배하는 덕목은 총 다섯 개로, 무식, 열정, 규율, 참회, 그리고 순종이다. 신에 대해 열정적이고, 교리에 충실하며 스스로에게 책임을 돌리고 신의 뜻을 거부하지 않는 것까지는 이해한다 치더라도 맨 앞의 덕목인 ‘무식’은 아무래도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덕목일 것이다. ‘무식’의 존재는 이 게임의 주제를 이해하고 다른 덕목들의 의미까지도 밝혀주는 중요한 열쇠다.

‘슈라우디드 아일’ 에서 강조되는 5대 덕목은 현실의 덕목과는 거리감이 크다. 특히 ‘무식함’ 이 장려되는 사회라는 점은 맹목성의 닫힌 사회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무식’은 좀 더 정확히는 신앙 외의 것에 대한 관심과 지식을 차단하는 맹목성을 가리킨다. 무식의 기준에서 죄는 과학적 지식에 대한 호기심이나 독서광 같은 것들이 된다. 앎이 곧 신앙을 무너뜨린다는 것이다. 닫힌 사회에서 진리로 간주되는 맹목적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진리에 대한 의심의 시발점인 호기심을 차단해야 할 것이고, 그렇기에 게임 안에서 반지성주의로서의 ‘무식’은 종교가 자신을 지키기 위한 제1의 방어기제로 활용된다.

다른 네 개의 덕목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읽을 경우 일상적 의미가 아님을 알게 된다. 열정은 오직 신을 향한 것만 허용되고, 규율은 교리라는 범주 안에서만 규율이다. 게임은 이러한 덕목의 배치를 통해 닫힌 사회가 추구하는 덕목이 인간이 아닌 신앙의 체계를 위해 설정된 것임을 드러낸다. 마치 생물이 자기방어기제를 갖듯이 게임 속의 종교 혹은 신은 자신의 체계를 지키기 위한 덕목으로 사람들을 옭아매고 있다. 하지만, 게임의 메인 테마는 이런 종교에 관한 우화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스스로 광신에 물들어가는 자기 자신에 주목하라
‘슈라우디드 아일’의 세계가 광신과 맹목으로 점철되어 있는 닫힌 세계의 모티브를 다루고는 있지만, 재미있게도 이 게임의 중심 주제는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광신 그 자체에 머무르지 않는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지점은 따로 있다. 게임 속에서 대제사장의 역할을 맡아 계절마다 사람을 죽이며 3년 후 신의 재림을 준비하는 자, 바로 플레이어 자신이다.

실제 게임을 플레이한 대부분의 플레이어가 공통으로 겪는 경험은 게임에 지나치게 몰입하는 자신에 대한 자각이다. 너무나도 어처구니없는 광신도 마을을 경험한 플레이어는 기괴한 덕목과 그로부터 비롯되는 어이없는 죄목으로 사람을 죽여야 한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거부감을 경험한다. 무고한 이들을 살해하는 결정을 내려야 할 때 누르게 되는 ‘살해’ 버튼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플레이어들은 게임의 엔딩을 보기 위해, 실제 대제사장의 롤플레잉에 몰입해, 3년이라는 시간을 버텨 게임의 엔딩에 다다르게 된다. 게임의 끝에서 플레이어들은 섬뜩한 사실 하나를 마주하게 된다. 반복되는 턴 구조 하에 중후반부를 넘어서면 플레이어는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몹시 자연스럽게 누군가를 죽이는 결정을 하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처음엔 ‘뭐 이런 게임이 다 있어?’라는 생각을 하던 플레이어는 후반부에 접어들면서 오직 게임 속의 변수들을 조절하는 것에만 골몰하게 된다. ‘지난 계절에 A 가문을 죽였으니 불만이 안 생기려면 이번 계절엔 다른 가문을 고르자’ ‘M 씨는 이 정도 죄로는 죽이기 아까우니 일단 뒀다가 다음 계절에 죽이자’ ‘B 가문에 불만이 높이 올라가니 같은 죄인이라면 이번엔 C 가문을 죽이자’와 같은 생각을 하며 희생자를 고르게 된다.

오직 엔딩에 도달하겠다는 목표만을 바라보고 플레이하는 플레이어의 모습에서 묘한 맹목성을 확인할 수 있다. 초반에 분명 현실의 도덕성과 얽히며 머뭇거렸던 플레이어가 어느새 자연스럽게 희생자 선정을 위한 최적화 전략에 거리낌 없이 골몰하게 되는 이 변화가 ‘슈라우디드 아일’이 플레이어에게 던지는 가장 큰 메시지다. 이같이 게임 로직이 교묘히 설계된 '슈라우디드 아일'은 이곳에 빠져든 플레이어의 행동 변화를 통해 광신과 맹목을 이야기한다.

‘슈라우디드 아일’은 닫힌 사회의 맹목성이라는 꽤나 익숙한 주제를 고립된 섬이란 배경을 통해 다뤘지만, 같은 주제를 다루는 다른 매체들과 달리 게임 매체 특유의 성질을 활용해 메시지의 중심에 수용자인 플레이어를 갖다 놓음으로써 보기 드문 장면을 연출해 냈다. 대제사장 롤플레잉을 수행하며 어느새 게임 로직이 강요하는 엔딩을 향해서 달려가는 플레이어는 게임의 안팎에서 동시에 맹목성을 경험하게 된다. 플레이어 자신의 변화를 깨닫는 순간 ‘슈라우디드 아일’의 주제의식은 더욱 명료하고 강렬하게 다가온다.

닫힌 사회의 맹목이라는 주제 자체는 이미 다른 매체들이 적지 않게 다뤄 왔지만, 게임 매체의 특수성을 살린 새로운 접근방식으로 ‘슈라우디드 아일’은 보다 새로운 의미로 플레이어들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단순한 오락적 기능을 넘어 이제는 메시징의 의미로 나아가고 있는 게임매체니만큼, 앞으로도 적지 않은 고전들의 주제가 게임의 형식을 타고 새롭게 변주될 것이다. 그리고 그 변주의 결과는 디지털 사회가 일상이 된 시대의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또 하나의 문화적 혜택이다.

대학신문  snupress@snu.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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