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미술대학 52-2동 '기록방'

낙성대역 1번 출구에서 골목으로 들어서면 인헌시장의 초입이 보인다. 사람들이 각자의 목적을 갖고 바쁘게 오가는 인헌시장의 익숙한 풍경 속, 특별한 공간이 있다. 동네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곳, ‘기록방’이 그곳이다. 한적한 골목 한쪽에 자리한 기록방은 문을 활짝 연 채로 방문자들을 반긴다.

기록방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보이는 전경. 색 테이프로 덧대어 만든 '기록방' 문구가 보이고, 책상엔 기록방 주변 상인들의 인터뷰를 담은 기록지가 놓여있다. (사진제공: 기록방)

기록방은 지난 4월부터 진행된 서울시 공공미술 프로젝트 ‘서울은 미술관’의 일환으로 시작됐다. 총 7개의 서울시 내 대학이 참여하고 있는 대학 협력 사업의 목적은 지역 주민들과 대학생들이 공공미술을 통해 서로 대화하고 그 지역의 문제를 함께 해결해가는 것이다. 현재 서울대에선 9명의 미술대학원생이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52-2동 기록방’이라는 이름으로 그들만의 공공미술을 실현하고 있다.

기록방은 ̒기록’을 통해 공공미술을 구현하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거대한 조형물이나 온 동네에 그려진 벽화만을 공공미술이라 생각하지만 기록방은 다소 생소한 방식인 ‘기록’으로 공공미술을 이야기한다. 박지원 씨(조소과 석사과정·15)는 “지역 사람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프로젝트이기 때문에 그들을 수동적 대상으로 여기는 일을 가장 경계했다”며 “공공미술이 가진 특성을 강조하면서도 시혜적이지 않은 관점에서 활동을 진행하려다 보니 가장 꾸밈없는 방법이 기록이었다”고 설명했다.

팀원들은 이곳의 지역성을 깨닫는 과정에서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지역성을 주제로 한 젠트리피케이션, 주거 환경 문제, 고령화로 인한 청년 유출 등의 사회적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진행되는 공공미술의 추세와 달리 이들이 자리잡은 낙성대 일대는 비교적 큰 변화를 겪고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박지원 씨는 “낙성대역 주변은 재래시장이 활성화돼 있고 매일 바쁘게 사는 학생, 고시생, 직장인들이 몰려 있는 곳”이라며 “과도한 공공미술을 시도한다면 오히려 예술이 지역에 녹아들지 못하는 상황이었다”라고 설명했다.

그렇기에 팀원들은 지역과 공공미술이 서로 스며들게 하기 위한 활동들을 기획했다. 우선 팀원들은 지역 주민들에게 떡을 돌리며 기록방의 존재를 알렸다. 또한 서울대 학생들을 기록방으로 초대해 서울대 근처의 지역을 소개하는 ‘집들이’ 활동을 하는 등 지역 주민과 사람들, 그리고 기록방이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을 가졌다.

‘떡 돌리기’와 ‘집들이’ 활동이 이뤄진 뒤엔 시장의 상인들과 지역 주민들을 만났다. 그들과 나눈 대화를 통해 알게 된 지역성을 토대로 기획한 것이 매주 금요일과 토요일 저녁 시간대에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영화 트는 밤’이다. 바쁘게 살고 있는 지역 사람들이 접근하기 쉬운 문화 공간을 제공하려 한 것이었다. 박지원 씨는 “최근 상영한 영화는 '아이웨이웨이'와 ̒인생은 백 살부터'라는 실화 기반의 다큐멘터리 영화들”이라며 “사람들이 편하게 접근할 수 있는 영화부터 미술계 전반을 다루는 영화, 사회문제와 공공미술을 함께 생각해볼 수 있는 영화가 상영된다”고 선정 기준을 밝혔다.

뿐만 아니라 자취인을 비롯해 누구든지 도시락을 들고 와서 함께 밥을 먹자는 취지의 ‘혼자 먹지 말아요’, 자신과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약 20분간 글과 그림으로 풀어내는 ‘기록기록 끼록끼록’ 등 주민 참여적인 활동들이 진행 중이다.

팀원들은 가장 기억에 남는 활동으로 수집된 정보를 분류해 두 개의 지도에 시각화한 작업을 꼽았다. 팀원들은 오랫동안 이 지역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역사서 같은 지도를 만들었고, 이곳에 정착한 지 얼마 안 된 이주민의 이야기를 모아 맛집 지도와 같은 감각에 의존한 지도를 또 하나 만들기도 했다. 정희윤 씨(조소과 석사과정·17)는 “마을 주민들도 지도를 보고 다양한 이야기를 보태 훨씬 더 풍부한 지도를 만들 수 있었다”고 당시의 소감을 전했다.

올해 10월에 책을 내면서 그간의 기록을 전시하는 것을 끝으로 기록방은 프로젝트를 마무리 짓게 된다. 박지원 씨는“공공미술을 기획한 사람들이 사라지더라도 그 예술의 주체가 주민이기 때문에 주민들로부터 이어지는 공공미술이 이상적인 것 같다”며 “이 지역에서 공공미술을 하게 될 사람들에게 우리의 활동이 연결되기를 바라며 서울대 인근 지역의 공공미술 입문서 역할을 할 책을 낼 예정”이라고 말했다. 일상생활에 지친 저녁,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기록방의 문을 두드려보자. 주민들이,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가 주체가 된 이곳 기록방은 목요일 오후 6시부터 9시, 금요일 오후 5시부터 9시, 토요일 오후 4시부터 9시까지 열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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