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철기 강사
정치외교학부

정치학이라는 학문에 전념하게 된 이유들 중 하나는 정치에 ‘관한’ 학문인만큼이나 ‘정치적’ 학문이라는 일말의 소신 때문이다. 그래서 강의의 일차적 목표는 분명 정치에 관한 지식을 전달하고 그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어야겠지만, 동시에 ‘정치적으로’ 말하고 생각한다는 문제와 결코 무관해서는 안 된다고 믿는 편이다. 그런데 ‘정치적으로’라는 말을 쓰게 되면 흔히 ‘특정 정파의 편에서’ 혹은 ‘어떤 이념이나 가치를 옹호하는 입장에서’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그것이 오늘날 이 말의 주된 용법이다.

하지만 나는 다른 용법을 제안하고 싶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지지하는 정당이 없다거나, 혹은 응원하는 정치가 한명도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특정한 이념이나 가치가 다른 것들에 비해서 더 옳다고 믿는 신념과 전혀 무관한 삶을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아마도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우리에게 친숙한 용법과는 달리 ‘공적으로’라는 뜻에 가깝고 더 나아가 ‘동료 시민으로서’라는 의미에 더 근접한다고 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언어를 구사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유는 지난 10년의 경험과 관찰의 결과이고, 또한 정치에 관한 특정한 관점 덕분이다. 우리는 초인적인 사적 유능함과 완벽한 공적 무능함에 대한 지속적이고 공공연한 요구가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잘 알고 있다. 특별히 덧붙일 수 있는 말이 없다. 하지만 ‘동료 시민으로서의 공적 삶’으로서의 정치에 관해 몇 마디를 보탤 수 있을 것이다.

정치는 ‘생물’이라든가 국가는 ‘유기체’라는 식의 언어로부터 거리를 둘 이유는 분명히 존재한다. 왜냐하면 정치는 그 고유의 의미에서 인공의 영역이자 인위적 활동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은 과거 역사 대부분의 기간 동안 정치의 인공성과 인위성이 함축하는 자의성과 우연성을 자연 질서에 대한 모방이라는 필연성으로 정당화하려고 노력해 왔다. 역사적 관점에서 그 노력을 전적으로 무의미했다고 말할 만큼 확신은 없다. 하지만 바로 동일한 확신 부재 때문에 공동의 정치적 운명에 종속돼 있고, 심지어 민주공화국의 동료 시민으로서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자연적 정당화도 힘들어진다.

정치와 공적인 것이 인공의 영역이라는 말은 그것이 다수의 노력에 의해 만들어진 어떤 것이라는 의미다. 인위적인 제작의 행위 없이 정치를 생각할 수는 없는데, 아무런 수고와 비용이 들지 않는 제작과 생산이란 초월적 질서의 섭리나 기적과 같은 관념에 기대지 않는 한 상상하기 힘들다. 자유주의와 계몽주의의 언어는 세속국가의 일원으로서 시민 한 사람이 마치 보편적 규범에 대한 ‘각성’의 결과물인 것처럼 말해왔다. 각성에 이르지 못한 것은 각자의 책임이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로 국가와 정치지도자를 종교적 광신과 숭배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자연과학과 기술적 혁신을 음모론의 관점에서 맹목적으로 거부하지 않는 비판적 시민, 소수자의 존재를 찬성이나 반대의 문제로 보지 않고 동료 시민을 시민권이 없는 동물에 비유하지 않는 그러한 시민과 같이 이 민주공화국에서 살아가기를 원한다면 선행돼야 할 것이 있다. 그들을 양육하고 교육하고 훈련시키며, 그들과 우리의 시민성을 유지시키고 업데이트하기 위해 소요되는 비용을 산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과연 사회가 이러한 공적 비용을 적절하게 지불해왔는가, 그리고 과연 우리는 기꺼이 그 비용을 지불하려는 용의가 있는가를 자문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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