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문학창작동아리 '총문학연구회' 소설 기고

슈슈와 릴리


현경은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이라는 영화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였고 혜준은 릴리 알렌이라는 가수를 좋아했다. 현경은 영화감독이 꿈이었고 그래서 틈틈이 시나리오 습작을 한다고 했다. 혜준은 중간고사가 끝나고 전학을 왔는데, 미대입시를 준비했고 이전에는 예고를 다녔다고 했다. 우리는 반이 모두 달랐지만 CA 활동을 하던 영화부에서 만났다.
나는 현경이 좋아한다는 영화를 찾아서 보고 혜준이 좋아한다는 가수의 노래를 찾아 들었다. 둘 다 내 취향은 아닌 것 같았다. 애들이 내게 너는 뭘 좋아하냐고 물었을 때 나는 바로 떠오르는 것이 없어서 조금 고민한 뒤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재밌고 따뜻하고 읽으면 기분 좋아지고. 난 그런 것이 좋았다.

2학년 때까지는 야자를 하지 않고 학교에서는 석식만 먹은 뒤 학교 근처의 구립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했다. 해가 길어지기 시작하고 아직 모기가 없는 봄에는 도서관 벤치에 앉아 해가 지는 것을 구경하며 엠피쓰리로 노래를 듣기도 했다. 공부를 하기 싫은 날에는 하염없이 동네를 쏘다녔다.
한 번은 구립도서관에서 혜준을 봤다. 평소와 달리 조용하고 풀이 푹 죽어버린 모습이었다. 혜준은 나를 기다렸다고 했다.
여기 오면 너를 만날 수 있을 거 같아서.
목도리를 둘둘 싸매고, 패딩잠바 안으로 몸을 움츠린 혜준이 가방을 끌어안고 벤치에 앉아 있었다.
나는 얼른 혜준을 데리고 도서관 안으로 들어갔다. 자판기에서 따뜻한 제티를 두 개 뽑아서 혜준의 손에 모두 쥐어줬다. 현경이랑 싸웠어.
그 추운 밖에서 연락도 없이 무턱대고 나를 기다렸던 혜준. 달달 떨리는 몸보다 마음이 더 차가웠을까. 소리없이 울고 있는 것 같았던 혜준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나는 팔로 혜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 후로도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혜준의 숨소리만이 들려왔다.
다음 날 복도에서 혜준을 마주쳤다. 혜준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평소처럼 밝게 인사를 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가슴 부근에서 찢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고 그건 아마도 내 표정에도 어떤 변화를 드리웠을 거다. 혜준은 눈이 감길 정도로 웃으며 어제는 고마웠어, 하고 말했다. 그게 내가 기억할 수 있는 혜준의 모습 중 마지막이다. 혜준은 얼마안가 전학을 갔다.

고삼 때 나와 현경은 같은 반이 되었지만 서로 대화할 일이 별로 없었다. 우리는 밥을 먹는 무리가 서로 달랐고, 현경은 쉬는 시간이면 묵묵하게 자신의 자리에서 문제집을 펴놓고 공부를 했다.
수능이 끝났을 즈음, 현경과 나는 같은 날 입시 상담을 받게 되었다. 현경 다음이 내 차례였는데 상담을 마치고 텅 빈 교실을 나와 보니 기대 밖으로 현경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은 첫눈이 내렸다. 듬성듬성 날리는 눈이었다. 눈은 쌓이지 못했다. 3학년들도 거의 다 집에 가고 다른 학년들은 모두 학교 안에 있을 시간이라 한산한 학교 앞의 거리를 지나 버스정류장까지 함께 갔다. 그때 나는 열린 현경의 가방 앞주머니를 닫아 주면서 그 안으로 혜준이 쓰던 캐릭터 샤프를 알아보았다. 내가 혜준에 대한 화제를 꺼냈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현경은 말했다. 승연아 너가 나는 계속 글을 썼으면 좋겠어. 보고 싶다. 네 글.
그때 나는 아무 글도 쓰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현경의 말이 조금 얼떨떨했던 기억이 난다. 다만 누군가가 나를 글을 쓰는 사람으로 봐주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 물컹하고 뜨끈미지근했다. 이게 현경과 나의 마지막 대화다.

2학년 여름 방학 때 우리는 영화부 활동으로 짧은 영화를 한 편 찍었다. 영화의 제목은 비오는 날이었다. 시나리오를 내가 원작을 썼고 현경이 그걸 윤색했다. 연기, 촬영, 소품, 분장 등의 일 모두에 부원들이 고루 참여했고, 마지막에 영상을 편집하는 작업에는 혜준, 나 그리고 현경만이 남아서 일을 도맡았다. 우리는 영상 편집을 위해 방학동안 매일 같이 만나면서 가까워졌다.
영화의 내용은 주인공이 비를 맞고 다니는 것이었다. 어린 시절 꿈속에서 만난 신 내지 상상 속 친구 비슷한 존재가 비가 되어 이 세상으로 현현한다는 설정이었고, 주인공은 이런 세부적인 사실은 인식하고 있지도 못하면서도 그저 자신도 알 수 없는 이유로 비를 맞고 다닌다는 얘기였다. (처량 맞게 물에 젖은 생쥐처럼 비를 맞는 것은 아니고 비옷은 입고 맞고 다녔다.) 왜 이런 이야기를 썼는지 지금은 기억이 하나도 안 난다. 현경이 내게 해주었던 말을 기억할 뿐이다. 네 이야기에서는 없어보여도 있다고 말하고 있잖아. 나는 그게 좋아.

우리는 방학이 있었네


모든 부원을 대상으로 시나리오를 받았지만 현경은 시나리오를 내지 않았다고 했다. 시나리오의 배경이 겨울이라서 공모전 날짜에 맞춰서 영화를 찍을 수는 없을 것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나는 그저 정말 그런 줄로만 알았다.
그런 자존심 세워서 뭐할 거야. 너 써놓은 것도 많잖아.
됐어. 그런 소리 하지 마. 우리 지금 꺼로 잘 찍고 있잖아.
여느 때처럼 셋이 모여서 혜준의 노트북으로 영상을 편집하고 있던 때였다. 혜준의 말이 나는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자존심이라니. 그건 또 무슨 말인가. 혜준과 현경 사이에는 내가 낄 수 없는 기류가 늘 있긴 했다. 둘은 같은 버스를 타고 집에 갔고, 둘이 서로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나는 모르고 지나치거나 한 박자 늦게 알게 되곤 했다. 뭔가 묻고 싶은 것이 있어도 굳이 물어보기가 겸연쩍어서 입을 열지 않고 넘어가는 때도 있었다. 이건 단순히 시간을 더 많이 보내고 덜 보내고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내가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이라는 영화와 릴리 알렌이라는 가수의 노래를 좋아할 수는 없는 것처럼 우리 사이에는 어떤 분명한 선이 있었다. 나는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었다. 그 아이들과 나는 다른 세계를 살고 있었다.
내가 동그랗게 눈을 뜨고 ‘왜. 왜 자존심이 상하는데?’하고 묻자 혜준은 설명을 시작했다.
이거 대회, 우리가 영화 찍어서 나가는 대회 그거 다 스펙 만들려고 하는 거잖아. 영화 전공할 것도 아니면서 대학 가려고. 아름다운 생활기록부를 만들려고. 우리 신현경 감독님은 말야 그런 것 자존심 상해서 못 찍는대.
겨울이 아니라서 못 찍는다니까.
현경은 혜준의 말이 꼭 틀린 말은 아니라는 표정을 지은 채 그렇게 말했다. 현경은 그랬다. 항상 입으로는 담담하게 몇 마디만을 뱉으면서도, 표정으로 그 말 이상의 것들을 말하곤 했다.
에휴. 안 되겠다. 안 되겠어.
혜준이 짧은 단발머리를 흔들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서는 필통에서 캐릭터샤프를 꺼내 연습장에다 적기 시작했다. 혜준은 하얀 얼굴에 쌍꺼풀은 없지만 윤곽이 또렷한 눈과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었다. 머리에는 선생님들에게 걸리지 않을 정도의 펌을 항상 넣고 다녔다. 이런 외양도 외양이었지만 혜준이 들고 다니는 학용품들은 문방구가 아닌 디자인문구점에서 산 것처럼 세련된 것들이었으며 행동거지가 어딘지 고고한 느낌을 주었다. 자신의 감상을 흘려보내지 않고 표현하는 편이었고, 그러면서도 눈치 없이 자기 얘기만 한다는 느낌이 없었던 건 혜준이 지닌 어떤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붕 떠 있는 것 같지만, 양감을 충분히 가지고 있는 분위기가. 가령 혜준이 들려준 노래를 내가 마음에 든다고 하면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며 ‘꼭 이 앨범 전곡으로 다 들어봐. 진짜니까. 허수는 없어.’ 하고 말하는 식이었다.
혜준이 내민 종이에는 ‘겨울 방학 계획’이라고 위에 크게 적혀 있었고 그 밑에 또한 큰 글씨로 ‘현경’s 영화 찍기’라고 써있었다. 현경이 평소의 표정을 허물고 아이처럼 웃었다. 나는 ‘그럼 배우는 내가 해야지.’ 하고 말했던 거 같다. 영화는 고사하고 다시는 서로 보지도 못하는 사이가 될 것이라는 것도 모른 채. 학교 근처 맥도날드 2층에서 소프트콘을 제 앞에 하나씩 두고 우리는 함께 웃었다.

좋아하는 멜로디


웃어보이던 혜준의 얼굴, 없어보여도 있다고 하는 것이 좋다던 현경의 말, 내게 계속 글을 쓰라고 말하면서 현경이 지었던 표정. 성적이 좋았던 현경은 영화와는 상관없는 학과에 진학했다. 혜준의 그 샤프가 왜 현경 가방 앞주머니에 들어 있던 건지, 혜준과 현경이 왜 싸웠는지 그리고 그 일이 있고 나서 왜 혜준은 곧바로 전학을 갔는지. 이러한 것들에 나는 말로는 어떤 설명도 덧붙일 수가 없었다. 어떤 설명을 듣지 않아도 감각할 수 있는 것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도 내가 그 아이들의 세계 어느 구석으로부터 아주 단호하게 소외당했다는 기분을 생생하게 느낀다. 그 세계는 다양한 층위를 가진 것이었어서, 어느 한 가지 의미로 그 기분을 정의할 수는 없었다. 그 소외라는 것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그저 단지 나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어떤 배척에 의한 것일지라 하더라도.

네 이야기에서는 없어보여도 있다고 말하고 있잖아. 나는 그게 좋아.

현경은 말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이제는 저 말이 지닌 당시에도 지녔던 빛뿐만이 아니라 온기를 또한 나는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나에게 뿐만 아니라 현경에게도. 저 말이 우리 둘 모두에게 유효한 얼마만큼의 온기를 지니고 있다는 걸.

이호상 철학과·13

삽화: 박진희 기자 jinyhere@snu.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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