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민 기자
사진부

길고양이에 대해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고양이 알레르기가 있어 항상 고양이를 피해왔고, 길고양이를 도둑고양이라고 불러왔다. 하지만 이러한 나의 인식은 지난 여름 새하얀 고양이 한 마리를 만난 이후로 완전히 바뀌었다. 버려진 고양이인지 야생고양이인지도 확실치 않았던 그 고양이는 처음 보는 내게 다가와 몸을 비벼댔다. 그 순간 고양이에 대해 가지고 있던 약간의 공포와 낯섦, 그리고 망설임이 한 번에 무너져 내렸다. 그 날 이후 나는 매일 하굣길에 길고양이를 찾아갔다. 길고양이에 대한 기획기사를 준비했고, 알레르기 약을 먹으면서 취재를 다녔다.

기획기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가장 많이 했던 고민은 ‘어떻게 불편함 없이 공존의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을까’였다. 길고양이 학대 사건이 꾸준히 일어나고 있는 요즘, 혹자에게는 이 기사가 ‘가치관의 강요’로 다가오지 않을까? 이 고민은 TNR을 다룰 때 나를 특히 힘들게 했다. TNR은 길고양이 중성화수술의 일종으로, 현재로서는 길고양이의 개체수를 조절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안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TNR은 아직 많은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 소재다. 실제로 주변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으니 TNR은 다루지 않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도 받았다. 하지만 TNR에 대한 내용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었기에, 나는 ‘TNR을 정당화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겠다’는 대안을 제시했다. 결국 TNR의 의의 중 논란의 여지가 있는 내용을 배제하고 인간에게 가는 이득만 언급하게 됐다. 이렇게 나는 문제의식을 오롯이 담기보다 이견 발생의 가능성이 적은 안전한 길을 택했다.

TNR에 대한 논의에서도 그랬듯 나는 논란의 여지를 줄이고자 기획안을 길고양이 돌봄 활동을 가볍게 소개하는 방향으로 수정했다. ‘길고양이와의 공존’이란 키워드 역시 자칫 불편할 수 있는 소재라 판단했기에 그 비중을 줄였고, 본래의 취지는 허울밖에 남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지난 9월 한 달 동안 다녀온 몇 번의 취재는 무기력한 나를 바꿔놓았다.

그 중 가장 기억에 남았던 취재는 연세대 학생회관 앞 ‘하꽈니’의 취재였다. 학생회관에 도착하자마자 본 것은 하꽈니에게 인사하는 수많은 사람들이었다. 하꽈니를 발견한 사람들은 모두 하꽈니를 부르며 손을 흔들었다. 사람 손을 잘 타는, 일명 ‘개냥이’로 유명한 하꽈니는 사람들에 둘러싸인 채 고양이 세수를 하고 있었다. 또한 사람들은 길고양이를 대하는 방법도 대충은 알고 있었다. 하꽈니를 쓰다듬던 학생에게 “혹시 츄르(고양이 간식) 하나 줘도 될까요?”라고 묻자 “하꽈니가 요새 살이 조금 쪄서 많이는 안 되고 캔으로 된 간식이 아니니 하나 정도는 괜찮을 거예요”라는 의외로 상세한 답변이 돌아왔다. 사람들은 언제나 같은 자리에 머무르는 하꽈니에 관심을 가지고 그를 소중히 대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함께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길고양이 돌봄 단체들을 취재하며 ‘공존’을 목격한 나는 그것에 대해 이야기할 용기를 얻었다. 기사 작성 과정에서 ‘공존의 메시지’의 비중은 점차 커졌고, 완성된 기사에서는 공존이라는 키워드가 글 전체를 관통하고 있었다. 길고양이와의 공존은 거창한 개념이 아니다. 길고양이를 진심으로 걱정하며 보살피던 사람들은 나에게 길고양이와의 공존이 그렇게 먼 이야기가 아님을 가르쳐줬다. 길고양이를 피하지 않고 그들에 대해 ‘생각’을 하기 시작하는 것, 그것이 공존을 향한 첫 걸음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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