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 박민정의 소설을 읽으며

올해 출간된 문학상 작품집이나, 최종심사 과정을 전하는 기사에는 굳이 이런 말들이 꼭 따라붙고 있습니다. ‘여성 작가들의 약진’ 혹은 ‘문단 내 성폭력 파문의 결과’… 어떤 작가들은 오래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자기 작품을 쓰고 있을 뿐인데 말이죠. 저는 쓸쓸하게도 어떤 사람들에게는 지금이 예외상태인가 보다, 생각했습니다. 저에게는 평생을 다해도 모자란 이야기들이 있는데, 지금이 항구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는 불안함은 자꾸 스스로를 다그칩니다. 지금이 아니라면 이 목소리가 확성기를 달 일은 앞으로 다시 없을지도 모른다, 거의 그런 심정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박민정, 「‘이 계절의 소설’ 선정작 인터뷰」, 『문지 블로그』, 2017년 여름)

올 여름 두 번째 소설집 『아내들의 학교』를 출간한 작가 박민정이 최근의 한 인터뷰에서 말한 내용이다. 작년 “#문단_내_성폭력” 사태를 거친 이후 최근의 문단이 유독 여성 작가들의 작품에 전에 없는 많은 관심을 보이는 상황에 대해 박민정은 다소 불편한 심경을 드러내면서도 이 “예외적 상태”가 자신에게 얼마나 절박한지에 대해서도 고백해본다.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민음사, 2016)이 그 미학적 성취에 대한 유보적 판단들에도 불구하고 최근의 한국 소설로서는 예외적으로 짧은 시간 동안 엄청난 판매부수를 기록하게 된 사정에서도 확인되듯, 이른바 여성작가들의 ‘여성주의적’ 목소리가 ‘확성기를 단 듯’ 주목 받고 있는 최근의 상황은 정말로 지금이 어떤 기회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끔 한다. 누군가의 “평생을 다해도 모자란 이야기”들이 비로소 시작될 기회 말이다.

성능 좋은 확성기 없이도 박민정은 사실 그 이야기들을 지속적으로 꺼내온 작가다. 한 해 출간된 책 중 작가의 첫 창작집만을 대상으로 진행되는, 이른바 문단의 진짜 ‘신인상’이라고 할 만한 김준성문학상의 2015년도 수상작인 『유령이 신체를 얻을 때』(민음사, 2014)에서부터 박민정은 자기 세대의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일상의 폭력을 섬세히 다루는 데 집중해왔다. 그때의 심사평을 찾아보니 이런 문장이 있다. “그간의 외로운 작업에 대한 조금의 보상이 되기를, 그리고 앞으로의 어쩌면 더 외로울 작업에 대한 격려가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해본다.”(「김준성 문학상 심사평」, 『21세기문학』, 2015년 여름호) 불과 1~2년 전까지의 문단을 생각해보더라도 현실의 조건과는 무관하게 여성주의적 시각의 작품들이 주제적 측면에서 익숙하고 진부하다는 평가를 받아오기도 한 점을 생각한다면, 그러한 주제의식을 지속적으로 탐색했던 박민정 작가가 이전에 느꼈을 외로움도, 그리고 최근의 상황 속에서 느낄 법한 절박한 불안이라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작가와 같은 심경이 되어 그녀의 소설을 읽는 독자들도 아마 많을 것이다.

첫 소설집 『유령이 신체를 얻을 때』가 1980년대에 태어나 1990년대에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낸, 흔히 ‘IMF 세대’ 또는 ‘88만원 세대’라 호명되는 세대의 자의식을 기저로 삼아 청년 세대의 여성에게 가해지는 구조적 폭력을 그려내고 있다면, 『아내들의 학교』는 해설을 쓴 강지희의 말처럼 “세대라는 공통 기반이 이미 신기루가 돼버렸음을 인지하면서, 온갖 혐오들이 중첩돼 만들어낸 사태를 긴밀하게 살핀다.”(「키클롭스의 외눈과 불협화음의 형식」) 세대라는 공통 기반이 허상에 불과하다는 인식을 박민정 소설에서 새롭게 읽어낼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떤 변화일까. 두 가지 측면에서 이야기해볼 수 있을 것이다.

세대론은 기본적으로 앞세대에 대한 뒷세대의 인정투쟁을 전제로 한다. 그렇다면 세대론을 빗겨가고 있는 박민정의 변화는, 현재의 한국사회에서는 그러한 세대 간 인정투쟁을 통한 어떠한 변화도 사실 불가능하다는 인식, 즉 “모두 망했다고 봐야 한다”(p.47)라는 인식이 세대를 초월하여 팽배하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세대라는 개념이 계급이나 성차로 구조화됐던 한 사회를 다르게 설명하기 위해 대두된 사회학의 후발 개념이라는 점도 상기할 필요가 있다.(울리케 유라이트·미하엘 빌트 편, 『‘세대’란 무엇인가』, 한울아카데미, 2014, p. 14) 이러한 점을 토대로 볼 때, 박민정의 변화는 그간 세대라는 집단적 정체성에 주목함으로써 우리가 놓친 많은 사회적 갈등들을 다시금 비판적으로 환기해보려는 노력으로도 읽힌다. 세대를 다소간 거둬낸 박민정의 『아내들의 학교』에서는 민족, 국가, (경제적) 계급 등과 맞물린 인간 사회의 뿌리 깊은 여성혐오의 양태들이 더욱 뚜렷하게 가시화된다.

「행복의 과학」과 「A코에게 보낸 유서」로 이어지는 연작이 대표적이다. ‘행복의 과학’이라는 신흥 종교에 빠져 넷우익으로 활동했던 소년 ‘류’의 이야기를 번역·출간하려 준비 중인 여성 편집자 ‘하나’와 ‘수영’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류’의 가족사와 하나의 가족사를 엮으며, 「행복의 과학」은 혐한의 문제와 여성혐오의 문제를 겹쳐놓는다. 대학시절의 ‘하나’가 남자 선배들로부터 겪었던 다소 우스꽝스러운 일상적 여성혐오는 물론, “젊고 예쁜 한국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혐오 살해의 피해자가 된 ‘박양’에 이르기까지, 박민정은 여성혐오가 시대와 국경을 넘어 얼마나 은밀히 지속되어온 문제적 사태인지, 더 정확히 말해 민족과 결부된 여성혐오가 얼마나 지독한 방식으로 작동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박양’을 살해한 ‘기노시타 미노루’(류의 아버지)의 유서와, 살해당한 박양이 죽기 전까지 썼던 일기, 그리고 ‘기노시타 히로무’(류의 조부)의 한국인 현지처의 사생아로 자란 ‘하나’의 이야기가 교차 편집된 「A코에게 보낸 유서」에서도 인종주의 혹은 가족주의와 결부된 여성혐오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자이니치라는 열등한 조건을 부정하기 위해 동족의 여학생을 겁탈하는 미노루의 친구 ‘유타로’에서부터, 일본에서의 성매매를 통해 민족적 우월감을 확인하려는 한국인 남성들에 이르기까지, 여성 혐오가 민족, 인종, 계급 등 여타의 조건들과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으며 강화되는지를 박민정은 집요하게 파헤친다.

당대의 여성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위해 소설을 쓴다고 할 때 그 소설이 일상의 영역에 다양하게 퍼져 있는 여성혐오의 양태들을 수집하고 기록하며 그것들이 작동하는 원리를 철저히 파헤치는 보고서의 형태로 머물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박민정이 세대적 자의식을 초월한 곳에서, 인종, 민족, 국가, 계급 등의 구조와 연동돼 작동하는 여성혐오의 양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는 이 글의 이러한 짧은 해석도 제 소임을 다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박민정은 평생을 다해도 모자란 이야기들이 쌓여 있다고 했다. 그만큼 다양한 사례들이 있다는 말이기 이전에, 아무리 반복해서 말해도 절대 변하지 않은 현실을 아프게 지적하는 말로 들린다. 그녀가 그 넘쳐나는 이야기들을 지치지 않고 해주기를 응원해본다. 그녀의 이야기를 역시나 지치지 않고 들어주는 독자들이 그녀의 성능 좋은 확성기가 돼 줄 것이다.

조연정 문학평론가
-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 200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등단
- 서울대 기초교육원 강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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