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손지윤 기자 unoni0310@snu.kr

언제부터인지 ‘안전’은 자주 떠올랐다 가라앉는 대국민 이슈가 됐다. 올해만 해도 계란 파동에 뒤이어 생리대, 지진과 원전까지 안전 문제가 얽혀들었다. 요즘 너무 만사에 안전의 의미가 붙지 않나 싶기도 하지만, 내가 해를 입을지 모른다는 불안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실제로 벌어지지 않은 일이라도 경고등을 켜고 ‘STOP!’을 외칠 수밖에 없다.

허나 고질적이고 근본적인 생존문제임에도 수면 위에 쉽사리 떠오르지 않는 것도 있다. 1994년 발표된 DSM-Ⅳ(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에서는 세계 여러 문화에서 나타나는 문화특수적 증후군을 제시했다. 그중 한국인에게 고유하게 나타나는 문화특수적 증후군으로 화병(火病)이 소개되었다. 화병은 분노의 억제에 기인하는 분명한 심리적 문제이지만, 소화불량, 호흡곤란, 두통, 상복부에 덩어리가 맺힌 느낌 등의 신체화 증상이 두드러진다. 비슷한 경험을 단 한번이라도 해본 사람은 많을 것이다. 억울하고 분함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때, 숨이 꽉 막히면서 가슴이 타오르고 답답해 주먹으로 치게 되는 기분 말이다. 분노, 즉 화나 불편한 감정이 표현할 길 없이 무작정 억제되면 이는 울화가 되고, 몸의 증상으로도 드러날 수 있다.

한편 최근 한 가구회사에서 신입사원이 상사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구체적 진실은 더 밝혀져야 하지만,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은 ‘서로 호감’을 가진 사이에서 강제성 없이 벌어진 일이라며 증거자료로 카톡 내용을 공개했다. 피해자가 자신을 피해자라고 생각하면서 이렇게 일상적이고 친절하게 답변을 할 수 있냐는 것이다. 뒤이어 한 대학병원에서는 사내행사 때 간호사들에게 선정적인 옷을 입고 춤을 추게 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오디션’에서 뽑힌 간호사들의 공연이니 그들의 온전한 자유의지에 의한 춤이라고 생각한 모양인지 병원 측은 초반에 ‘강제성이 없었다’고 변명했다. 그래도 질타가 쏟아지자, 좋은 의도의 행사였지만 본의 아니게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다며 누구를 향한 것인지 모를 사과로 사태를 무마시켰다.

두 당사자는 모두, 적극적으로 행위를 강요하지 않았고 피해자도 적극적인 반대 의사나 부정적인 감정을 표출하지 않았기에 강제성이 없다며 책임을 부인했다. 신입사원이 상사에게 ‘당신이 나에게 해를 가했습니다’라고 쉽게 말할 수 있는가? 그 내용이 무엇이든 ‘싫습니다’라고 단호하게 거절하기 쉬울까? 춤을 추라는 것과, 여기서 얘기 좀 하다 가자는 것은 신입사원과 간호사의 입장에서 느낄 때에도 실제로 제안인가, 무늬만 제안인가? 제안에 대한 거절과 강요에 대한 거절은 그 무게가 다르다. 문제 병원의 댄서로 차출되었던 간호사들은 나중에 불이익이 돌아올까 두려워서, 소위 상급자에게 ‘찍히니까’ 당시 그것을 강력하게 반대할 수 없었다고 언론 인터뷰에서 말하고 있다.

어떤 시스템에서는 거절하지 않고, 참고, 감추고, 일단 믿고, 일단 하자는 대로 하는 것이 그 시스템 안에서 ‘일단 생존’하는 방식이었음을 두 사건은 보여준다. 정신과 의사들은 화병을 지닌 사람은 자기연민을 반복하면서 수동적 운명관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보고한다. 화병은 전통적으로는 중년 이후의 여성에게서 많이 찾아볼 수 있었고, 전형적으로 낮은 사회적 계층에 많다. 이 상관이 단순 우연은 아닐 것이다. 수면위에 떠오르지 않은 말과 마음은 물 속에서 익사하고 있음을, 모두 잘 알고 있다.

김빈나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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