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문을 나서며

김지수
법학전문대학원 석사졸업

졸업을 앞두고 한 달간 남미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페루나 볼리비아 시골이나 도시 외곽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야트막한 집들의 형태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사방에 기다란 철근을 땅에 박아 콘크리트를 채워 기둥을 만들었는데, 철근의 길이가 한 층의 높이보다 긴데도 천장 밖으로 삐져나온 부분을 잘라내지 않고 마감 없이 그대로 둔 모습이었습니다. 멀리서 바라보면 삐져나온 철근 부분과 TV 안테나가 구별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심지어 노출된 철근 기둥들 사이로 줄을 걸어 태연하게 빨래를 말리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듣기로는 그곳 사람들은 철근 마감 없이도 공사가 끝났다고 생각하고, 나중에 살림살이가 나아졌을 때 위에 새로 증축할 수 있어 외려 선호되는 형태라 하더군요. 비죽비죽한 모양새가 마치 저의 20대 시절을 보는 느낌이어서 흥미로웠습니다.

그러고 보니 정확히 10년 전이라니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만, 제가 입학한 2008학년도는 전무후무한 등급제 수능을 치렀어야 했던 때였고 복수 전공 및 연합 전공이 처음으로 의무화되었던 해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고급영어 수강은 아직 의무가 아니었던 시절이었고, 특히나 2011년 법학전문대학원 개원이 결정되어 있었기에 저는 사라질 학과에 문을 닫고 입학한 마지막 학번이 되었습니다. 네, 저는 ‘그’ 법대 08학번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15학번으로 그 법학전문대학원에 입학해, 그해 겨울 전국적으로 떠들썩했던 로스쿨 시위에서 저를 비롯한 대다수 법대생이 학부 청춘을 바쳤던 사법시험의 폐지를 외치게 되었을 때, 저는 인생이 대단히 얄궂을 수도 있단 것을 느꼈습니다.

정말이지 2008년, 20대라는 집을 짓기 위해 철근을 박기 시작했을 때에는 지금의 제 모습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이게 얼마나 오래전이냐면, 스마트폰은 당연히 없었고, 지금의 서암 법학도서관은 당시 갓 공사 첫 삽을 뜬 상태였을 뿐이며, 관정 도서관은 물론 두산인문관도 없었던 시절입니다. 지금 감골식당 자리에는 후생관 건물이 있어서 주머니가 얇은 날에는 밥 한 공기와 국 한 그릇을 각 5백 원에 사 먹을 수도 있었습니다. 법대생들은 당시 주차장이었던 지금의 사회대 신양관 터에서 팩 차기를 했었죠. 무엇보다 충격적이었던 것은 너무나 당연하게 ‘입구역’이란 애칭으로 불렀던 서울대입구역이 대략 10학번부터는 ‘설입’으로 바꿔 불리는 것을 목격한 것입니다. 우연히 학교에 계속 남아있었을 뿐인데 학교 역사 격변기(?)의 산 증인이 되어버린 기분입니다. 저도 선배들로부터 예술대 앞 걷고 싶은 길이나 자하연 옆 데크를 설치하던 시절 이야기를 전래동화 듣듯이 했던 때가 있었는데 말이죠. 한국 나이로 서른 살이나 먹고, 전문석사까지 마치고서야, ‘교문을 나’설 수 있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철근이 비죽비죽 튀어나온 저의 집을 사랑합니다. 여력이 닿는 대로 층수를 올렸고, 속도가 어떻든 꾸준히 공사를 이어나갔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지을 30대의 집은 또 어떤 모습 이려나요.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사회 한구석에 있을 저의 자리에서 열심히 한 층씩 쌓아나가야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후배들께 감히 조언을 드릴 수 있다면, 대학 생활은 누구나 겪기에 보편적이지만 나만이 오롯이 느끼기에 특별하고 개별적이라 생각합니다. 언뜻 모순적일 이 보편성과 개별성 사이에서 현명한 줄다리기를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이리저리 끌려다니느라 좀 힘들었거든요. 비죽이 튀어나올 철근 위에 어떤 미래를 올릴지, 어떤 집으로 만들지 고민해봅시다. 그럼,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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