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권민주 기자
“내가 있는 곳에서 불법과 범죄가 자행되고 다른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데 나는 살아남았다면 ……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나의 죄다.”

살아남았다는 것만으로도 죄가 될 수 있을까. 그 엄격함으로 인해 나의 살아있음도 한없이 무거워졌다. 이 서늘한 문장이 나오는 것은 카를 야스퍼스의 『죄의 문제』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독일 국민을 향해 반성과 행동을 촉구하고자 했던 야스퍼스는 죄와 책임을 법적인 죄, 정치적인 죄, 도덕적인 죄, 형이상학적 죄라는 네 가지로 분류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형이상학적 죄다. 그것은 어떤 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발생하는 것, 개인의 악행과 무관하지만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감당해야 하는 죄다. 그것은 인간의 비참한 운명에 공명하는 것으로서, 세계 내 존재로서의 연대의식과 관련되는 것이다.

이런 죄와 책임을 실제로 적용하기엔 모호한 부분이 있다. 그리고 형이상학적 죄는 주관주의를 통해 책임을 회피하게 만들고, 책임문제를 형이상학적으로 채색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패전이 가져다준 비참 속에서 금기시되던 죄와 책임에 대한 문제 제기였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그것은 공동체 일원으로서의 마땅한 책임을 일깨우는 경종이었다. 우리는 실제로 법적, 정치적, 도덕적 죄 개념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죄책감을 느낀다. 그리고 살아있음 자체만으로 미안함과 부끄러움, 책임감을 느끼기도 한다.

우리 사회는 세월호 참사 이후 살아남은 자의 죄의식과 한없이 깊은 슬픔을 경험하고 있다. ‘세월호 이후’ 문학에서 타인의 죽음과 살아남은 자들의 이야기가 자주 등장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황정은의 「누구도 가본 적 없는」, 김연수의 「저녁이면 마냥 걸었다」, 김애란의 「입동」은 모두 사고로 자식을 잃고 난 이후의 삶을 그리고 있다. 굳이 문학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일상 속에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느끼는 책임과 고통에 대한 공감, 연대의식을 드러내는 노란 리본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얼마 전, 세월호 참사 당일 박근혜 전 대통령의 행적 중 일부가 드러났다. 구조의 골든타임이 지나도록 박근혜 전 대통령은 관저 침실에 머무르며 안보실장의 전화도 받지 않았으며, 한참 후에야 민간인 최순실과 사후 대응을 논의했다는 것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 측근들이 세월호 참사 당일의 행적을 왜 그리도 필사적으로 은폐하려 했는지 알 법도 했다. 대통령으로서 주권자인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해야 할 의무를 다하지 못한 정치적 무능의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책임과 공감의식마저 부재해 보이는 행적이 아닐 수 없다. 수많은 생명이 스러져가는 순간, 그 수많은 타인의 고통이 누군가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었나 보다. 살아남는다는 것, 살아남았다는 것이 의미하는 그 무거운 책임은 어디로 간 것일까. 아직도 법적, 정치적 잘못을 은폐하기에만 급급한 모습은 살아남은 자의 윤리를 보여주기는커녕, 자신만 살아남으려는 이기주의의 민낯을 잘 보여준다.

잔인한 달인 4월이 또 왔다. 녹슬고 부서진 채 인양된 세월호의 육중한 선체는 그 자체로 마음을 무겁게 한다. 세월호 참사는 비단 구멍 난 국가 안전 시스템의 탓으로만 돌릴 수 없다. 생명을 존중하지 않고 타인의 고통에 전혀 공감하지 않는, 그런 세상에서 비참한 재난은 끊임없이 반복된다는 점을 생각하게 된다.

유예현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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