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 ‘히든 워커스’(Hidden Workers) 기획전에 다녀오다

자연에서 식량을 얻던 수렵시대에서 농경 사회를 거쳐 현대사회에 이르기까지 가사, 육아, 서비스 노동은 대부분 여성의 몫으로 여겨졌다. 이런 여성들의 노동 활동은 우리 주변에 항상 존재하지만 쉽게 눈에 띄지 않아 재화나 가치를 생산하는 보편적인 노동으로서 인정받지 못하곤 했다. 여성의 가사와 돌봄, 그 외의 서비스 노동은 ‘생산적인’ 일을 해내는 남성 노동자들의 일을 돕는 부차적인 일로 간주돼 온 것이다. 이에 여성이 겪는 노동 활동의 고충을 미술관에서 풀어보자는 문제의식을 중심으로, 그간 가려진 여성의 노동을 현대 미술을 통해 조명하는 ‘히든 워커스’(Hidden Workers) 기획전이 지난 5일(목) ‘코리아나미술관’에서 개최됐다. 코리아나미술관 유승희 관장은 “당사자와 개입자, 관찰자와 기록자, 스토리텔러와 스토리메이커로 등장하는 여성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해 다채로운 방법으로 여성의 전반적인 노동 활동을 다루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이날 열린 오프닝 퍼포먼스에서 임샛별 씨가 서비스 노동에 종사하는 여성이 느끼는 감정을 현대 무용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히든 워커스 전의 개최를 맞아 현대 무용가 임샛별 씨의 오프닝 퍼포먼스 ‘Hello?’는 여성 노동자들의 고충을 드러내는 해당 전시의 주제의식을 꿰뚫는 작품이다. 실제 서비스업 종사자들이 듣는 목소리가 음악과 함께 들려오자 임샛별 무용가는 다양한 안무를 통해 감정노동자들이 겪는 감정을 표현한다. 그는 주로 여성들로 구성된 서비스 노동자들이 느끼는 감정을 현대무용으로 나타내며 인간의 감정마저 노동력으로 사용하는 현대 사회에 안부를 물었다. 당혹감, 화, 수치심으로 시작한 감정은 작품이 전개되며 복수심, 증오의 감정을 거쳐 결국엔 무력감, 공포, 불안을 나타내며 끝을 맺는다. 역동적인 퍼포먼스를 통해 사회의 규범에 따라 통제되는 감정을 표출하고자 한 것이다.

벽면에 전시된 ‘하프포트 워시: 닦기/자국/메인터넌스’(1973)의 모습이다. 미얼 래더맨 유켈리스가 퍼포먼스의 일환으로 직접 미술관의 실내외를 청소하는 장면을 담아냈다.

전시회의 주제의식을 꿰뚫는 오프닝 퍼포먼스 외에도 전시장의 다양한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작가가 여성 노동 활동의 당사자로 등장하는 작품에선 작가가 처한 상황과 그 상황에 대한 자신의 입장이 잘 드러난다. 전시회의 한 쪽 벽면엔 미국의 퍼포먼스 작가 미얼 래더맨 유켈리스의 ‘메인터넌스 예술을 위한 선언문 1969!’(1969)가 전시돼 있다. 이 작품은 단순히 선언문의 형태를 띠지만 여성의 노동 활동을 예술로 승화시키며 그 의미를 갖는다. 박혜진 큐레이터는 “결혼과 출산 이후 가사 노동과 육아에 시간을 뺏겨 예술 활동에 전념하지 못했다”며 “그런 상황 속에서 가사 노동과 육아 역시 하나의 예술 활동이 될 수 있다고 선언한 것”이라 설명했다. 이 선언문은 “유지 관리 노동(메인터넌스)은 ‘메인터넌스 직업=최저 임금’ ‘주부일=무보수’라는 등식으로 하찮은 지위를 부여받는다”고 여성들의 노동이 갖는 가치를 폄하하던 당시 사회 분위기를 비판했다. 한편 선언문은 “내가 예술이라고 말하는 모든 것은 예술이다. 내가 하는 모든 예술은 예술이다”라고 주장하며 가사 노동과 육아 역시 예술이 될 수 있음을 표현했다. 이 선언문 옆엔 작가가 미술관의 실내외를 청소하는 퍼포먼스를 사진으로 담아낸 ‘하트포트 워시: 닦기/자국/메인터넌스’(1973)가 걸려있다. 작가가 자신의 유지 관리 노동을 공적 영역에서 드러냄으로써 자신의 행위 역시 예술의 한 부분임을 표현한 것이다.

임윤경 작가의 ‘너에게 보내는 편지’가 상영되는 모습이다. 사진 속 여성은 자신이 돌보았던 아이에게 영상편지를 남기며 아이 돌보미가 겪는 강도 높은 감정 노동을 드러냈다.

또한 관찰자로서 여성의 노동을 작품에 담아낸 작가들은 다른 여성의 노동 활동을 관찰자의 시점에서 바라보면서 객관화하고 사회 구조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메인터넌스 예술을 위한 선언문 1969!’의 맞은편 공간엔 영상물을 감상할 수 있는 공간이 준비돼 있다. 각각의 부스에선 임윤경 작가의 ‘너에게 보내는 편지’(2012~2014)가 상영된다. 이 작품은 아이 돌보미가 아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영상편지 형식으로 제작한 것이다. 영상 속 여성들은 강도 높은 감정 노동을 말로 풀어내며 그들이 주로 담당하는 일이 결코 가볍거나 쉬운 것이 아님을 드러낸다. 박혜진 큐레이터는 “이들은 노동 시장에 진출한 여성들을 대신해 아이를 돌봐주는 아이돌보미 역할을 했다”며 “이 작품은 여성의 사회 진출을 위해선 제3자에게 육아를 위임하는 육아 ‘아웃소싱’이 뒷받침돼야하는 현실을 비판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임윤경 작가의 다른 작품인 ‘지속되는 시간’(2014)은 아래층 벽면에서 상영된다. 반으로 나뉜 화면의 한 쪽엔 출근하는 여성, 다른 쪽엔 퇴근하는 여성의 모습을 비춰 다양한 종류의 서비스직에 종사하는 여성들을 표현했다. 이날 전시회를 관람한 강형흔 씨(20)는 “평소 어머니가 일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는데 작품 ‘지속되는 시간’이 어머니대 나이의 여성들이 어떻게 노동을 하고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어서 기억에 남는다”고 그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한편 스토리 텔러로서의 작가는 여성이 노동 활동을 하며 겪을 법한 일들을 새롭게 엮어 여성의 노동을 이야기하고 있다. 심혜정 작가의 ‘아라비아인과 낙타’(2013)는 여성의 이주 노동과 관련된 문제를 다룬다. 잘 알려진 우화 「아라비아인과 낙타」에선 낙타가 조금씩 아라비아인의 공간을 침범하다가 결국엔 아라비아인을 밖으로 내쫓는다. 이 우화처럼 작품에선 주인공의 집에서 일하는 재중동포 여성이 자신의 방식대로 집을 꾸며놓은 것에 대해 주인공은 불편한 감정을 느껴 재중동포 여성과 갈등을 빚는다. 그러나 그 동포 여성 역시 타인의 사적인 공간에 갑자기 내던져진 당혹스러웠던 경험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 작품은 여성 이주 노동자가 타국에서 뿌리를 내리며 마주하게 될 어려움을 그려냄으로써 ‘주변인’으로서의 여성 노동자를 조명했다.

이번 히든 워커스 전은 그간 주목받지 못했던 여성 노동자들의 가치를 발견하고, 노동 현장의 불평등한 젠더구조를 드러내고 있다. 오프닝 퍼포먼스를 관람한 윤소정 씨(25)는 “페미니즘에 대한 논의는 활발하지만 이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을 담은 전시는 정작 많이 없었다”며 “이번 히든 워커스 전은 이런 페미니즘 전시를 원해왔던 많은 사람의 기대에 부응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여성의 노동 활동을 다채롭고 신선한 시각으로 바라보고 싶다면 코리아나미술관의 히든 워커스 전에 다녀오는 것은 어떨까.


사진: 대학신문 snupress@snu.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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