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숙정 강사
인류학과

이번엔 흑산도로 들어가는 겨울 바다가 거칠다. 지난겨울엔 섬에서 뭍으로 나오는 뱃길이 험했다. 심하게 요동치는 배 안 여기저기서 승객들이 시각적으로 청각적으로 괴로워했다. 어촌의 문화 연구자로서 뱃멀미를 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그러나 높은 파도를 올라탄 배가 아래로 떨어질 때의 물리적 중력은 심리적 불안감으로 바뀌며 온몸을 굳게 만들었다. 그러면서 200년 전 이 바닷길을 건넜던 손암(巽菴) 정약전에 생각이 멈추었다. 1801년 천주교 박해의 광풍에 휘말려 죄인의 몸으로 이 바닷길을 건너야 했던 정약전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때도 바다가 이렇게 성이 났었을까? 정약전이 나주에서 동생 정약용과 생이별을 하고 살아서는 다시 밟지 못하게 된 뭍을 떠났던 그때도 추운 겨울이었다.

유배인 정약전이 보는 흑산도는 남달랐을 것이다. 오죽하면 흑산(黑山)이라는 이름의 어감조차 두려워 자산(玆山)으로 바꿔 불렀을까. 그러나 나는 어떤 기대와 설렘을 가지고 흑산으로 향하고 있었다. 정약전이 1814년에 흑산 바다의 해양생물을 연구하고 『자산어보』를 저술한 역사의 현장에 가는 길이기 때문이었다. 거기엔 유배 생활의 절망과 두려운 현실에 굴복하지 않고 실사구시를 실현하고자 했던 실학자, 그리고 신분의 귀천을 떠나 섬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며 이용후생을 고민했던 너무나 인간적이었던 선비 정약전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정약전을 도와 『자산어보』의 탄생을 가능하게 했던 섬사람 장창대(張昌大, 1792-?)가 있기 때문이었다.

장창대는 집안이 가난해 책은 많지 않지만 옛 책을 탐독하고 자연을 세밀하게 살피고 깊이 생각해 그 성질과 이치를 파악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생면부지였던 정약전과 장창대는 서로 마음이 통해 밤새 토론을 하곤 했다. 정약전은 그의 책에 이 기이한 선비 장창대의 이름과 견해를 기록했고 『자산어보』의 탄생에 공이 있는 장창대의 이름을 역사 속에 살아 있게 했다. 역으로 장창대는 학문에 조예가 깊던 정약전을 통해 그의 목마른 학구열을 충족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자산어보』는 근대 과학적 생물 분류 형식을 갖춘 조선시대의 대표 어류 전문서로 회자되고 19세기 해양생물 관련 전통지식을 보여주는 문화유산으로서 재조명되고 있다. 그래서 역사의 거센 소용돌이로 인해 서남쪽 저 먼 변방의 섬에서 이뤄진 정약전과 장창대의 만남은 한국의 해양문화 연구사에 기억될 만한 역사의 아이러니다.

200년이 흐른 지금, 나는 문화의 관점에서 정약전의 『자산어보』를 토대로 흑산도 해양생물의 분류 지식을 연구하며 온고지신하고 있다. 흑산도에 가는 내겐 21세기의 장창대를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기대와 한편으로 두려움도 있었다. 이방인인 나를 받아 주고 그들이 흑산 바다에서 살아오며 경험하고 전승해온 지식과 지혜를 기꺼이 가르쳐줄 수 있는 장창대들을 만날 수 있기를.

정약전이 귀양살이한 마을에서 작년에 만난 80대의 한 촌옹은 내게 이렇게 묻고 당부했다. “박사님은 지금 이거 갖고 가서 연구하실 거요? 책으로 만들 거요? 책으로 만들면 언제쯤 만들겠소? 5년 안쪽에 나오오? 가급적이면은 우리 가기 전에. 꼭 그렇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19세기 정약전과 장창대가 남긴 『자산어보』가 21세기 흑산도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을 역사와 문화의 관점에서 인식하게 만든 것으로 읽히는 것은 지나친 것일까.

이번 뱃길처럼 나의 흑산행도 순탄치만은 않아 오랜만에 섬마을의 장창대들을 만나러 간다. 어르신들은 안녕하실까? 그분들에게 한 약속을 꼭 지켜야 할 텐데. 호방하고 열린 학자였던 정약전이 그 고뇌의 유배 생활을 이겨내고 저술한 『자산어보』를 보며 풍랑을 헤쳐가는 어지러운 마음을 다잡는다. 곧 흑산도에 도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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