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영

기계항공공학부 박사졸업

2008년 봄 큰 꿈을 가지고 관악에 들어온 지 딱 10년째가 되는 해 가을에, 이제는 이곳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붉게 물들어가는 단풍잎이 학교 떠나는 마음을 어루만져주니 더욱 마음이 애틋하다. 담담해지려 하지만, 학교 곳곳에 서려 있는 추억을 떠난다는 아쉬움과 스스로 안주했던 우물 안을 벗어난다는 기쁨이 뜨개질 된 실처럼 내 마음속에 얽혀 묘한 기분을 만든다.

박사라고 하면 대단한 결심을 하고 시작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아직도 내가 언제부터 이 분야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박사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대학교 수업 때 연구를 열심히 하시는 한 교수님께 ‘교수님께서는 왜 이 분야를 연구하셨나요?’라는 질문을 드렸더니, ‘어쩌다 보니 하고 있더라’라는 대답을 해 주셨다. 여느 위인전기에서도 찾기 힘든 솔직한 대답이었다. 되돌아보면 나는 내 인생의 무언가를 큰 계획 속에서 선택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나는 외국 여행을 가면 유명한 곳을 보고 오는 대신, 혼자 이 골목 저 골목 다니는 것을 좋아한다. 지난 유럽 여행 때는 로마에 머물면서도 꼭 봐야 한다는 바티칸을 관람하는 대신 온종일 로마 시내를 걸어 다녔었다. 그러면 동네 아이들이 놀고 있는 놀이터도 볼 수 있고, 노인들이 간단한 스포츠를 즐기는 모습, 재래시장의 시끌벅적한 분위기, 심지어 싸움이 일어난 것까지 볼 수 있다. 그곳에서 만난 여행객 덕분에 새로운 곳을 알게 되고 함께 예상치도 못한 곳을 여행하게 되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이 내가 선택한 우연이다.

언제부터인가 내가 살아가는 모습이 이 여행과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선택은 어떤 큰 계획보다는 생각지도 못한 일들과 사소한 이유로 인해 이루어졌던 것이었다. 학생회관에서 피아노를 치는 친구 모습이 멋있어 보여 피아노 동아리에 들어가 대학 생활 내내 피아노를 쳤고, 유럽 여행 마지막 날 마신 와인이 마음에 들어 학교에 와인 모임을 만들어 운영했으며, 친구가 하는 공연을 보러 갔다가 마음이 끌려 뮤지컬 동호회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박사를 하게 된 이유도 아주 사소한 이유였을 것이다. 그리고 대학원 생활도 나에게는 피아노를 치고, 와인을 마시고 뮤지컬을 하는 것과 크게 다를 것 없는 내 인생의 조그만 조각일 뿐이었다.

학교에 다니며 수많은 사소한 이유가 나를 움직이고 또 멈추게 했다. 그 이유는 책뿐만 아니라 셔틀버스를 타고 있을 때 옆에서 학우들이 나누는 담소에도 있었고, 학관 앞에 붙은 대자보에도, 학교에서 열리는 각종 행사 속에도 담겨 있었다. 나는 명시적으로 무엇을 선택하지는 않았지만 학교에 다니며 경험했던 모든 것들이 지금의 나를 만든 재료였다. 서울대학교에 다니며 수많은 좋은 재료를 모을 수 있었던 것은 나에게는 정말 크나큰 행운이었다.

이제 이 모든 걸 마음에 담고 더 큰 세상으로 나가려 하고 있다. 초등학교 때는 10년 뒤, 20년 뒤 내 모습을 그려보는 숙제를 곧잘 해내곤 했지만, 이제는 1년 뒤 내 모습도 잘 그려지지 않는다. 하지만 새롭게 만날 세상이 설레고 기대된다. 아! 이제야 알 것 같다. 지난 10년간 학교에서 경험하고 배웠던 것은, 책에 나오는 지식이 아니라 바로 이 자신감이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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