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럼프, 내 인생의 가장 가치 있는 시간을 위해
슬럼프, 내 인생의 가장 가치 있는 시간을 위해
  • 대학신문
  • 승인 2018.10.07 0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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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안 강사

심리학과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한여름의 더위가 지나고 서늘한 바람이 불어온다. 사람의 마음은 참으로 간사하다. 폭염에 시달릴 땐 그렇게 가을이 기다려지더니, 가을 냄새나는 찬바람에 ‘벌써 이렇게 한 해가 가는구나’ 싶어 마음 한 켠이 금세 헛헛해지곤 하니 말이다. 유난히 덥고 힘들던 여름을 잘 견뎠으니 남은 올해도 잘 해보자고 다짐하며, 대부분의 학생들이 몸과 마음을 바쁘게 움직이는 시기다. 그러나 그 속에서 나 혼자만 제자리걸음을 걷는 것 같은 자괴감과 무력감에 빠진 학생들이 있다. 새 학기엔 모든 것이 분주하게 돌아가기에 이런 감정은 상대적으로 더 크게 다가온다. ‘슬럼프에 빠졌구나.̓ 나도 그랬던 적이 있다.

십 수 년 전 대학을 졸업한 후, ‘창의적이고 새로운’ 일을 해보고 싶었던 나는 한 음악방송국에서 인턴 PD 생활을 한 적이 있다. 호기심 많고 외향적이고 활력이 넘치는 내 성격에 방송 일이 잘 맞을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게 내 착각일 줄이야! 나는 호기심은 있었지만 ‘충분한 탐색과 준비’가 부족했다. 학부 시절 다큐를 제작하고 영화판에서 경험을 쌓고 학교 방송국에서 PD를 했던 동기들과 비교했을 때, 나는 방송 제작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너무나 부족했다. ‘일단 들어가서 부딪쳐보자!’는 치기 어린 생각이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당시의 나는 ‘절실함’이 없었다. 입사 동기들이 한 평도 안 되는 편집실에서 밤새 녹화본을 편집하고 새벽에 퇴근하면서도 힘든 줄 모르겠다고 할 때, 나는 ‘내가 왜 이렇게 늦게까지 여기서 이러고 있어야 하지?’라는 생각이 더 컸다. 잘하고 싶었고 견뎌냈어야 할 시간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 머릿속엔 일에 대한 열정이 주는 느낌표보단 물음표가 가득했다. 새로운 분야에 대한 호기심은 이내 당황스러움으로 바뀌었고, 쏟아부을 준비가 돼 있던 에너지는 방향을 잃었다. 고민한다고 해서 바로 답이 나오는 문제도 아니었고 답이 나왔다고 바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닌 상황에서 나는 너무 혼란스러웠다.

결국 나는 적응을 못하고 그만뒀다. 곧바로 밀려드는 자괴감과 무력감. 한동안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한편으론 그런 날 볼 주변인들의 시선이 두려웠다. 나만 빼고 다들 바쁘고 열정에 넘쳐 보였다. 당시엔 이 시간이 그저 고통스러웠고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슬럼프 속에서 나는 나 자신을 조금 더 진지하게 들여다볼 수 있었다. 잔잔한 호수의 수면 아래 쉴 새 없이 놀리는 백조의 발처럼 나는 움직이고 있었다. 생전 처음으로 스스로 질문을 던졌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내가 원하는 삶은 무엇일까?’ ‘어떤 일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답이 쉽게 나오진 않았다. 그래서 고등학교 시절 읽었던 심리학 관련 책들을 다시 읽었다. 그중 한 책의 서문에 나와 있는 “참된 나 자신이 된다는 것은 곧 나의 이 얼굴, 이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수용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나를 수용하는 그만큼 우리는 남을 수용할 수 있고, 내가 나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그만큼 타인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는 구절이 마음속 깊이 박혔다. 고민 끝에 학업을 통해 참된 나를 찾고 삶을 재조명해야겠다는 결심을 했고 심리학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리고 지금은 대학 강단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으로, 야구 선수의 멘탈을 연구하고 코칭하는 야구 심리학자로 살고 있다.

슬럼프로 꼭 무언가를 깨닫고 배워야 하는 건 아니다. 그 어둡고 막막한 터널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온 것만 해도 얼마나 대견한가! 여러분은 아마 슬럼프를 겪으며 만신창이가 됐다고, 혹은 멘탈이 너덜너덜해졌을 거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 어느 정도 담담해졌을 때 돌아보면, 분명 그때보다 더 단단해진 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그 시절의 지독했던 슬럼프는 지금의 나를 있게 해준 가치 있는 시간이었다.

인생은 슬럼프의 연속이다. 슬럼프를 두 팔 벌려 환영할 건 아니지만, 이 시간이 가치 있는 시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기억해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미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고 있는, 그리고 더 잘 살고 싶은 자기 자신을 다독여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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