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혹, 광기, 그리고 니체 대 바그너
매혹, 광기, 그리고 니체 대 바그너
  • 이건창 전임기자
  • 승인 2018.11.18 06: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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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너마이트와 발퀴레의 만남과 대결을 좇다


◇이건창 전임기자가 직접 니체와 바그너의 발자취를 좇은 여행을 360도 VR 카메라로 기록했습니다. 철학과 음악이 함께 숨쉬는 현장을 함께 느껴보세요(톱니바퀴 버튼 설정>품질을 '2160s 4K'로 설정하고 감상하세요).

150년 전 11월, 24세의 프리드리히 니체는 라이프치히에 있었다. 학회에서 돌아온 그는 친구가 남긴 쪽지를 보고 곧장 밖으로 향한다. 들뜬 마음을 주체하지 못한 채였다. 메시지는 간결했다.

“리하르트 바그너를 만나고 싶다면, 극장 카페로. 3시 45분까지 올 것.”

주변의 소개로 당시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음악가에게 저녁 초대를 받은 니체. 그는 이 만남을 어찌나 기대했던지 “동화나 소설 속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라며 새 정장까지 맞춰 입는다. 마침내 바그너와 만난 니체는 그의 첫인상을 “엄청나게 활달하고 맹렬한 사람, 빠른 속도로 말하고 위트가 넘친다”고 묘사했다.

그러나 불과 20년 후, 니체는 180도 다른 평가를 한다. 1888년, 그는 『바그너의 경우』에서 “바그너는 인간이 아니라 질병”이라며 “그는 건드리는 모든 것을 병들게 한다”고 쓴다. 또 자신이 바그너에게서 등을 돌리고 벗어난 것을 ‘운명’이자 ‘자기극복’이라고 명명한다. 19세기 격동의 유럽에서 가장 위대했던 철학자와 음악가. 그 둘 사이에 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불꽃의 시작과 끝: 독일 뢰켄, 니체 생가

니체 사망 100주년에 클라우스 메서슈미트의 조각상이 가묘와 함께 세워졌다. 니체와 팔짱을 끼고 있는 어머니, 발가벗은 니체 두 명이 본인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모습이다. 아버지, 여동생과 함께 교회 앞에 묻혀있는 곳이 니체의 진짜 안식처다.

프리드리히 니체가 태어난 뢰켄은 인적이 드물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고속철로 4시간, 다시 택시로 1시간을 들어간 마을은 사람이 아니라 염소 울음소리가 반겼다. 목이 말랐는지 배가 고픈 건지 사람을 보자마자 강아지처럼 뛰어오는 염소 두 마리. 그 옆을 다소 쓸쓸하다 못해 초라한 교회 건물과 무덤 세 구가 지키고 있었다.

이제는 버려진 시골 마을의 예배당을 지켰던 사람은 니체의 아버지였다. 루터교 목사였던 그는 니체가 불과 5세일 때 뇌 질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 때문에 니체가 바그너에게 끌린 이유를 부성애의 결핍에서 찾는 해석도 있다. 그러나 연구자들은 이런 해석에 그다지 동의하지 않는다. 박찬국 교수(철학과)는 “바그너 자체가 주변 사람을 매혹하고 압도하는 인물”이라며 “니체가 특별히 아버지의 모습을 투사했던 것 같진 않다”고 했다.

니체가 태어난 곳이자 묻힌 곳을 돌아보다 보면 자연스레 드는 의문이 있다. 아버지가 목사인 만큼 기독교적인 가정환경에서 자란 니체가 어떻게 “신은 죽었다”고 선언할 수 있었을까? 안드레아스 우어스 좀머 교수(독일 프라이부르크대 철학과)는 “니체가 관찰한 기독교인들은 현생을 천국으로 가기 위한 ‘교각’ 정도로만 생각했다”며 “그런 생각은 세상에 대한 혐오였으며 니체는 신학과 역사 비평을 공부하며 이런 신념에 큰 의문을 품게 됐다”고 설명했다.

니체는 16~17세에 이미 이런 의심으로 신념을 지키기 어렵게 됐고 가족에게 교회에 가지 않겠다는 ‘폭탄선언’을 했다. 좀머 교수는 “평생 독실한 신자였던 니체의 어머니에겐 고통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라면서도 “니체의 결심을 되돌릴 순 없었다”고 덧붙였다.

신을 넘어선 철학과 음악: 스위스 트립셴, 바그너 박물관

여름날의 바그너 빌라는 평화로웠다.

습기를 다소 머금은 새벽 공기가 부드러웠다. 스위스 루체른시의 교외 트립셴에 위치한 바그너 박물관으로 향하는 길. ‘호수의 도시’의 여름 풍경답게 사람들은 더위를 피해 반쯤 나체로 아침부터 요트를 타거나 한가로이 멱을 감았다. 거대한 호수를 마주한 박물관은 실제 바그너가 부인 코지마, 아이들과 함께 살던 집이다. 그와의 첫 대면 이후 바로 다음 해에 스위스 바젤대 고전문헌학 교수로 부임한 니체는 바로 여기서 바그너와 본격적으로 교류하게 된다.

종교에 대한 신념을 상실하고, 대학 사회에서도 서서히 염증을 느끼던 니체. 그런 그에게 바그너와의 교류는 허무주의를 극복할 기회이자 신선한 자극이었다. 그들의 공통 관심사는 쇼펜하우어 철학이었다. 실제로 니체는 바그너와의 첫 만남을 묘사한 편지에 “바그너가 쇼펜하우어를 ‘음악의 정수를 이해한 유일한 철학자’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형언할 수 없는 따뜻함과 기쁨을 느꼈다”고 썼다. 박찬국 교수는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기독교의 내세 사상을 넘어선 ‘우주적 생존 의지’의 표현이 바로 음악”이라며 “바그너는 이 사상에 영감을 받았고, 니체가 이를 지지했다”고 말했다.

젊은 학자는 이 담대무쌍한 작곡가에게 깊은 감명과 영향을 받았다. 박찬국 교수는 “바그너가 ‘니벨룽의 반지’(Der Ring des Nibelungen) 중 ‘신들의 황혼’(Götterdämmerung)을 니체에게 바치는 음악이라고 말하자, 니체가 흥분해서 온종일 밥도 안 먹을 지경이었다”고 했다. 니체는 급기야 바그너의 음악에 맞춰 그리스 비극을 해석하는 책을 쓰게 됐다. 그 책이 바로 『비극의 탄생』이다. 박 교수는 『비극의 탄생』을 “바그너의 해석을 거의 그대로 수용해서 검증되지 않은 주장을 펼친 저술”이라고 평하며 이 책의 목적이 “유럽에서 바그너의 음악이 갖는 혁명적 의의를 전달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반면 니체가 바그너에게 미친 영향은 비교적 미미했다. 좀머 교수는 “총체예술작* 이 유럽의 사회·문화적 변혁을 이룰 수 있다는 니체의 서술이 바그너의 이론에 철학적 뒷받침과 정당화를 가져온 것은 맞지만 바그너는 니체를 만나기 전에도 이미 작품을 완성했기 때문에 영향이 크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찬국 교수도 “바그너에게 니체는 자신의 음악을 전파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니체 대 바그너, 자기극복의 슬픈 최후: 이탈리아 토리노, 카를로 알베르토 광장

니체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카를로 알베르토 광장에 니체 현판이 새겨졌다. 니체가 바라보고 있는 광장의 기마상은 사르데냐 왕국의 9번째 국왕 카를로 알베르토다.

포티코*가 미로처럼 이어진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도시에서 산책할 수 있도록 설계된 토리노의 거리를 거닐며 한 세기보다 더 전에 같은 길을 갔을 철학자를 떠올린다. 통로의 끝엔 널따란 광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광장엔 ‘이탈리아의 햄릿’이라 불렸던 군주의 힘찬 기마 동상이 있지만, 왠지 모르게 힘없이 쓰러진 다른 이를 떠올리게 했다. 여기서 니체는 바그너에 대한 애증을 한편에 간직한 채, 광인이 되기 전 마지막 세월을 보냈다.

1876년 여름, 바그너는 바이로이트 음악 축제의 첫 개최에 니체를 초대했다. 그러나 이는 결과적으로 둘의 결별을 부르고 말았다. 니체는 축제에서 유럽의 재탄생을 보길 원했지만, 온갖 귀족들과 호사가들이 모인 사교장 같은 분위기에 환멸을 느꼈다. 박찬국 교수는 “문제의식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바그너의 모습에 니체는 더 큰 실망을 했을 것”이라고 했다.

‘파르지팔’(1882)과 같은 작품에서 보이는 바그너의 기독교적 성향도 결별에 한몫했다. 좀머 교수는 “바그너의 이런 경향을 니체는 ‘데카당스’(퇴폐)라고 강하게 비판했다”며 “니체는 더는 바그너의 사도 역할을 할 수 없게 됐으며 스스로 메시아가 돼 유럽 세계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이후 바그너의 격렬한 비판자로 변한 니체는 그와의 결별을 ‘자기극복’이라 부르며 스위스와 이탈리아 등지에서 폭발적인 저술 활동을 했다. 좀머 교수는 “니체가 보기에 바그너와 쇼펜하우어는 과거에 머물러 있었다”며 “미래의 철학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자신밖에 없다고 봤다”고 했다. 박찬국 교수는 “니체는 자신의 철학이 항상 거대한 어떤 것과 싸운다고 생각했다”며 “당시 유럽을 지배하던 기독교와 바그너의 음악으로 대표되는 사상과 음악의 거대한 물결과 대결하기를 택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바그너와의 대결에 모든 걸 쏟은 니체는 1889년 초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쓰러진 후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고, 이후 11년 동안 비참한 상태로 여동생과 어머니의 간호를 받다 세상을 떠났다. 20대 초반 군대에서 낙마 사고를 당한 이후로 평생 병마와 싸웠으나 정신의 붕괴는 그도 어쩔 수 없었다. 비참한 생을 보냈지만, 이런 삶도 긍정하고 극복하려던 그의 ‘초극 정신’은 지금까지 살아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준다.

전문가들은 평생 ‘초극하는 삶’을 살았던 니체의 사상이 경쟁에 지친 청년들에게 주는 메시지가 있다고 입을 모은다. 좀머 교수는 그런 메시지 중의 하나로 “기존 가치에 지적으로 도전하는 것”을 꼽는다. 그에 따르면 전통적 가치에 도전하는 행위는 우리가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의심하게 하기 때문이다. 박찬국 교수 또한 “안일과 안락을 지양하는 강력한 청년의 정신”을 꼽았다. 박 교수는 “이러한 정신을 가질 때 학점이나 취업 경쟁에 연연하지 않고 큰 포부가 있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총체예술작(Gesamtkunstwerk): 19세기 말, 리하르트 바그너가 정립한 개념으로 ‘모든 예술의 종합’을 뜻한다. 음악, 미술, 건축, 연극 등 각 분야의 예술가들이 서로 협력해 모든 감각을 동원한 하나의 작품을 만드는 것을 말한다. 바그너가 주도한 오페라 개혁의 핵심 기반이 되는 개념이다.

*포티코(portico, 주랑 현관): 건물 입구로 이어지는 현관 또는 건물에서 확대된 주랑(柱廊). 통로 위로 지붕이 덮여 있으며 기둥으로 지지하거나 벽이 둘러쳐 있다. 이탈리아 토리노에는 18km의 포티코가 있으며 이 중 12km 이상이 서로 이어져 있다.

삽화: 홍해인 기자 hsea97@snu.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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