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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0회 대학문학상 영화•문학 평론 부문 우수작
  • 대학신문
  • 승인 2018.12.02 05:05
  • 수정 2018.12.02 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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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명’의 증언으로 기운 ‘한 명’의 삶이란 조각보

- 김숨의 『한 명』을 중심으로 -

이경인(국어국문학과·15)

상처를 논하는 문학의 난점을 해결하는 ‘아카이빙’의 소설 쓰기

한국 현대사가 겪어온 온갖 풍파를 나열하다 보면, 억압과 공포로 점철된 사건들 하나하나에 여전한 분노와 슬픔을 느끼게 되기도, 새삼스러운 놀라움을 느끼게 되기도 한다. 그중에서도 일제 강점기의 기억은 한국 사회에 여전히 확연하게 자리한 커다란 상흔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40여 년이 채 안 되는 기간이었음에도, 그 짧은 기간이 온갖 폭력과 야만으로 채워졌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거대한 상처를 제대로 마주하려는 시도에 실패했고, 일본은 제국주의 국가로서의 가해자성을 회피하거나 방관했다. 여전히 극복되지 않은 역사적 트라우마로 남은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를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그 시대를 해명해야 하나. 도무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이러한 물음들에 대해 미약하나마 꾸준히 답을 시도하는 움직임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문학일 테다.

물론, 답은 쉽지 않다. 당대를 직접 경험해야 했던 일제 강점기의 문사들에게 식민화된 조선은 역사적 사건이 아닌 피부로 느껴야 할 현실이었다. 그들에게 독립은 과거의 기록이 아닌 실제로 다가올지 가늠조차 안 되는 불가능에 가까운 미래였다. 독립 이후 일제 강점기를 그리는 문학 작품의 대부분도 그 시대를 살았던 자들의 기록이었고, 그만큼 그 시대에 객관적 거리를 유지한 작품을 기대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심지어 일제 강점기를 버텨낸 지식인들의 삶에는 떳떳하지 못한 구석이 많았다. 그들의 작품이 은연중에 일제 강점기의 상황을 회피하는 게 아닌가 싶다면, 그 또한 잘못된 판단이 아닌 합리적 의심일 것이다.

비록 허구에 불과할지라도 어떻게든 현실을 담아내도록 요구되는 문학에 대한 일반적 기대를 상기하자면, 일제 치하의 수모에 대해서도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고 거시적인 조망을 해내는 작품이 등장하기를 바라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는 당대를 살아갔던 문사들에게도, 그리고 그때의 트라우마를 조금도 해결하지 못한 지금의 문인들에게도 요원하고 불가능한 작업일지도 모른다. 단순히 과거의 참상에 분노하거나 절망하는 것은 쉬이 휘발될 감정이고, 그때의 잘잘못을 객관적으로 따져본다는 것은 문학만이 해낼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거시적인 조망이라는 말을 꺼내는 것은 쉽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수많은 문제를 두고 과연 냉정한 분석을 해보겠다는 것이, 그리고 당대를 살아가지도 않은 사람이 함부로 그때의 일을 거론한다는 것이 가능한 것인지 윤리적인 고민에 휩싸이게도 된다.

특히나 일본군 성노예 같은 경우를 짚어보자면, 과연 그러한 잔인함을 굳이 객관화라는 냉정한 관점에서 서술할 필요가 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된다.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와 관련한 논쟁이 그러했던 것처럼, 객관이란 이름은 여전한 아픔을 견뎌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사실주의를 가장한 폭력의 관점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여전히, 역사적 사건을 배경에 둔 소설에는 역사성이나 사실성 따위가 주문된다. 다만 허구라는 맥락 속에서, 그 ‘사실’이 개연성 있는 서사를 갖춘 온전한 이야기로서 재구성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에 더해서, 동시대의 문학에게는 과거의 사건을 지금 이 시대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보여줘야 한다는 또 하나의 요구가 주어진다. 당대를 직접 경험하지 않은 후속 세대 작가에게 객관성을 주문할 여지가 생기는 것도 역사적 사건의 재조명과 현재화라는 임무 때문이다.

서론이 길었으나, 결국 거론하고자 하는 소설인 김숨의 『한 명』은 이러한 맥락에서 꽤 현명한 돌파구를 마련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일본군 성노예라는 가장 거대한 역사적 트라우마 중의 하나를 소재로 선택하고, 이를 객관적이고 담담한 방식으로 서술하겠다는 것은 분명히 어려운 일이다. 이에 김숨은 아예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을 아카이빙하는 방식으로 소설을 구성했다. 증언의 조각들을 그러모아 그 사실들을 하나의 허구적 이야기 속에 배치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진행한 것이다. 그 속에 무려 316개의 증언이 스며들었다. 이때의 ‘허구적 설정’이란 우선 각기 다른 기억을 가진 위안부 피해자 분들의 이야기를 하나로 엮어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작가는 여기에 공식적으로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가 단 한 명만 생존한 시점이 소설의 배경이라는 또 다른 허구적 설정을 덧붙였다. 이 소설을 소설로 서게 하는 이러한 허구적 설정이 소설의 시작 전에 미리 전제된다. 『한 명』 분석의 출발점은 이 전제들에 있을 것이다. 그 전제의 의미를 밝혀나감으로써, 앞서 제기한 ‘역사적 상처를 거론하는 문학’의 ‘객관성’에 관한 난점이 다소 해소될 가능성을 찾아볼 수 있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을 소설적으로 재구성함’의 의미

*일러두기

1. 이 소설은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소설적으로 재구성된 것이다.

2. 인용한 증언들의 출처는 본문에 미주로 달았다.

(본문 8페이지 중에서)

소설을 시작하기에 앞서 ‘일러두기’를 통해 제시되는 두 문장은 본 소설의 취지와 목적을 상기시키는 가장 주요한 대목이라 할 수 있다. 그 내용을 좀 더 면밀하게 살피자면, 작가는 『한 명』이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이라는 사실들을 모아 ‘소설적으로 재구성’된 허구임을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인용한 증언들의 경우 그 출처를 미주로 달았다고 말하며, ‘일러두기 1’만으로도 충분히 독자에게 전달됐을 이 소설의 전제를 작품을 읽는 내내 상기하도록 유도한다. 독자는 굳이 소설의 맨 뒷장을 확인하지 않고서도 문장의 끝에 번호가 매겨진 것을 보고 그 문장의 묘사와 서술이 실제 사실이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미주가 달린 일부 문장은 심지어 진하게 표시돼 있다. 이를 작가적 선택에 의한 편집이라 생각하든, 소설 속 서술자 또는 인물의 강조점이라 생각하든, 소설이 꾸준히 밝혀내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참상이 전부 실제로도 벌어졌던 일임이 연거푸 강조된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을 것이다.

각기 다른 숱한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이 단 한 명의 기억으로 재구성된 것이기에, 이 소설이 허구적 상상을 기반에 둔 소설이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작품은 소설의 말미에야 ‘풍길’로 그 이름이 밝혀지는 ‘그녀’의 관점에서 이야기가 구성돼 있으며 ‘그녀’가 과거를 반추하는 대목과 아흔셋의 나이로 현재를 살아가는 대목을 교차하며 서사가 진행돼 나간다. 죽은 까치나 늙어버린 강아지, 양파망 속의 고양이 등 동물 모티프의 활용을 통해 삶과 죽음의 문제를 지적하는 대목에선 이 작품이 명백한 소설적 글쓰기의 산물임이 드러난다. 유령 같은 어린 여자아이가 ‘그녀’에게 건네는 보라색 탈 역시 ‘탈을 쓴다’는 행위로 이어지며 은폐와 불안을 상징한다는 가면 모티프에 관한 일반적 서술로서 설명될 수 있다. 그 가면에 입이 없고, 그 입을 ‘그녀’가 직접 만들어낸다는 설정 역시 그녀가 자신의 경험을 고백하기에 이른다는 이야기의 진행을 상징화한다. 분명한 소설적 구성인 셈이다. 그 외에도 눈여겨볼 만한 소설적 장치나 상징적 표현은 다양하다. 다만 앞서 지적한 대로, 계속해서 등장하는 진한 글씨와 문장 곳곳에서 발견되는 미주가 이 작품을 그저 소설로서만 바라보는 것을 거부하도록 하는 것이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겪어야 했을 고통의 묘사는 끔찍하리만큼 상세하다. 담담하게, 때로는 체념하며 당시를 서술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대부분 ‘보여주기’의 방식으로 당시를 회상한다. 이 보여주기의 상세함은 소설의 ‘일러두기’가 전제한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성취일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때의 ‘보여주기’가 단지 일본군 위안부 당시의 상황만을 서술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이 그녀들이 현재를 살아가는 방식과 그녀들에 대한 세간의 평가, 오해를 모두 포괄하기에 『한 명』은 성노예 피해 당시를 생생하게 그려냄은 물론 그 이후를 버티며 살아온 한 개인으로서, 장대하고 지난한 ‘그녀’ 개인의 총체적 서사를 꾸려낼 수 있었다.

‘그녀’는 일본의 무조건 항복 이후 오히려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가 돼 방황하며 무려 5년이 지나서야 고향에 도달했다. 이 5년을 방황이라고만 칭하는 것에도 부족함이 있다. 혹자는 그녀에게 도움을 건네듯 무일푼으로 일을 시켰고, 누군가는 그녀에게 몸이나 팔라는 식의 불쾌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 시달림의 끝에 도달한 고향에서도 ‘그녀’는 환대받지 못한다. 누구도 그녀를 반기지 않아 그녀는 쫓기듯 타지 생활을 시작하게 됐고, 위안부 시절의 아픔은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을 비밀로 남겨진다. 공식적인 위안부 피해자가 단 한 명이 남을 때까지도, 그녀는 비공식적인 피해자로서 그 비밀을 숨기며 살아간다.

오직 혼잣말로서만 ‘그녀’는 이야기할 수 있다. “여기 한 명이 더 살아 있다”라고. 이러한 소설의 시작은 끝까지 자신의 피해 사실을 숨겼을 수많은 피해자를 상기시킨다. 무려 20만 명이 성노예로 동원됐고 그중 2만 명만이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그녀’는 쉬이 받아들이지 못한다. 전기 검침원에게 20만 명 중의 2만 명이면 10분의 1이 맞는지를 되묻는 대목은, 자신이 처했던 폭력을 자신의 경험으로 서술하지 못하는 한편으로 계속해서 그 고통에 침잠하는 외상적 트라우마의 고통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더불어 그 2만 명이란 기록이 숨기고 있을, 말하지 못하는 트라우마 피해자들의 삶이 폭로된다.

‘역사’로서는 쉬이 기록되지 않는 개인의 사적 경험 또는 감정적 체험을 역사적 기록으로 서술하도록 한다는 점에서도 『한 명』의 의의를 찾아볼 수 있다. 이는 증언문학 또는 르포르타주로서의 문학에 대해 가지게 되는 가장 흔한 기대이기도 하다. 역사로서는 다 서술되지 못할 미시적 기록들을 문학적 진실이란 이름으로 소설 안에 담아내기를 희망하는 것이 증언문학 또는 르포르타주 문학의 역할이다. 하지만 『한 명』은 단순한 르포르타주 문학 이상의 성취를 해내고 있다. 『한 명』은 ‘일러두기’를 통해 전제한 바에서처럼, 증언의 수합이 아닌 증언의 소설적 재구성을 추구하는 소설로, 이 재구성을 통해 ‘풍길’이라는 인물의 삶을 그려내는 데 전력을 다한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개별적 체험을 존중하면서도 그들을 하나의 집합체로 형상화하는 데에도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결합을 통해 최종적으로 성노예 강제의 피해 여성들 또한 인간이라는 귀착점을 향한 도약을 해낸다. 평생을 자신의 삶을 숨겨온 ‘그녀’가 ‘풍길’이란 이름을 꺼내놓기까지, ‘나도 피해자다’를 적어내기까지, 그리고 공식적인 ‘한 명’을 만나러 가겠다는 결심을 하기까지, 그 지난한 과정은 결국 ‘행복하고 싶다’, ‘다시 태어난다면 평범한 여성이 되어보고 싶다’, 그리고 ‘인간은 인간다워야 한다’는 서술로 요약할 수 있는 인간 선언의 과정이다. 316개에 달하는 증언을 선별하고, 그들을 소설에 녹여내고, 다시 그들 하나하나에 우악스럽게 미주를 달아둔 작가 김숨의 의도를 그제야 이해하게 된다. 조각난 목소리로 표류할 뿐인 여러 명의 입을 통한 불완전한 사실들을 소설 속 인물을 통해서라도 하나의 일관된 진실로 서술해내려는 노력이 바로 그것이다. 이 서술이 비록 오래전부터 있어 왔던 단순한 인간 선언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있다 한들, 그들을 피해자로서만 재구성하는 사회에 대해 ‘나도 피해자다’는 선언이 ‘인간은 인간다워야 한다’는 성찰로 나아가는 과정이 던지는 파문은 꽤나 커다랄 것이다.

결국, 이 소설이 논하는 것은 단순한 증언의 조각보가 아니다. 그 증언을 모아내 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구성한다는 것은 타자적 존재의 삶이 고백적으로 재구성된다는 측면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비록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기억이라는 분명한 이중 구도에서 작가가 시도한 증언의 아카이빙은 전자에 쏠려 있고, 후자의 내용은 철저히 작가의 의도가 담긴 채로 구성됐다는 것이 설정상의 한계로 지목된다.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이 재구성을 시도했다는 점으로 충분한 의의를 가질 수 있다는 낙관적 평을 내려보고 싶다. 그간 일본 위안부 피해자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분명히 단순하고, 때로는 폭력적이었다. 여성으로서의 삶을 이미 흘려보내고 노인이 돼 세상에 과거의 참상을 폭로한 그들에게 우리가 건네는 분노와 동정은 분명한 한계를 노정한다. 증언들을 과거의 개인적인 고백이나 미시적인 경험으로만 남겨둘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이 흘려보낸 문제와 그 문제들이 산적해 그들에게 붙은 꼬리표, 그리고 그에 대한 우리의 편견 어린 시선들을 종합할 직언이 이제는 문학을 통해, 그리고 실제 우리들의 목소리를 통해 흘러나와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한 개인의 입에서 과거 위안부 피해자들의 참혹상이 폭로되고, 그 폭로를 담아두며 지금을 살아가고, 그 끝에 자신도 피해자이자 하나의 여성이자 하나의 인간임을 순차적으로 설명하는 이야기는 자못 심대한 메시지를 우리에게 안긴다.

‘생존해 계시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단 한 분뿐인 그 어느 날’의 의미

세월이 흘러, 생존해 계시는 위안부 피해자가 단 한 분뿐인 그 어느 날을 시점으로 하고 있음을 밝힙니다.

(본문 중 7페이지)

『한 명』은 이야기의 시작 이전, ‘일러두기’보다도 앞선 페이지에 소설의 시간적 배경에 대한 공지를 전한다. 세월이 흘러 생존 위안부 피해자가 한 분 남았을 시점이 소설의 배경으로 설정되는데, 이는 본 소설을 ‘역사적 기록으로서의 문학’이라 보는 관점에 정면충돌하는 문제적인 설정이다. 공식적으로 남은 마지막 생존자마저 중환자실에 누워 생명을 가까스로 부지하는 상황이란 곧 일본군 위안부의 만행을 폭로하고 관련한 역사적 사실을 직시하게 할 증언의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짐을 뜻한다. 일본군 성노예에 관한 역사적 체험의 문학적 아카이빙이자 훌륭한 르포르타주 문학으로 『한 명』을 소개하고는 하지만, 정작 그 소설의 내용은 증언 가능성이 소멸해가는 과정에 주목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이 모순의 핵심은 그 소멸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존재인 ‘그녀’에 있다. 또 다른 한 명인 ‘그녀’는 TV 너머의 마지막 생존자를 계속해서 떠올리고, 그녀의 삶을 상상하고, 상상 속에서 그녀를 만나고, 종국에는 그녀를 향한 여정에 오른다.

‘그녀’로부터 ‘그이’로 호명되는 마지막 생존자는 TV를 통해 자신의 삶을 적극적으로 알린다는 점에서 ‘그녀’와는 다른 성격의 인물로 그려진다. ‘그이’의 이야기는 ‘그녀’에게 깊은 울림을 전한다. ‘그이’는 싫어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자 좋아하는 것들의 목록을 늘려나가고 삶의 근거를 끊임없이 찾아보려 노력하며, 톨스토이의 『부활』을 읽고 삶의 아름다움에 대한 기쁨의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꽃을 사랑한다. 꽃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줄 알고, 소설을 읽으며 인간으로서 삶의 행복을 그릴 줄 아는 것으로 묘사되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정말로 ‘그이’가 ‘그녀’와 대비되는 인물에 그쳤다면 이 소설은 작위적인 설정이라는 비판에 시달려야 했을 것이다. 소설이 밝히고자 하는 모습은 긍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자 하는 ‘그이’의 그늘진 이면이다. ‘그이’의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는 젊은 여성은 그녀에게 아주 조심스럽게 혼자 사는 이유를 묻는다. 그 조심스러움 자체가 문제적이지만, 그에 대한 ‘그이’의 대답은 그녀가 시종일관 유지해오던 긍정적 분위기를 압도하는 회한에 잠겨 있다. 어떻게 누군가한테 자기의 짐을 떠안길 수 있겠느냐는 반문으로 요약되는 ‘그이’의 대답은 결국 ‘그이’ 역시 ‘그녀’와 같이 혼자 살아가는 존재에 불과하단 점을 상기시킨다.

결국, 생명력을 강조하는 ‘그이’의 삶이란 죽기 전까지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소망을 이루고자 고통을 애써 외면하는 삶인 것이다. 더불어 ‘그이’는 자신의 죽음이 곧 증언의 종료임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다. 곧 죽을 것만 같은 위급한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살아내고자 절규하는 처절한 사투가 이어지는 이유다. 고통을 회피하고자 하는 욕구와 고통을 처절히 기억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 혼재된 ‘그이’의 삶은, 죽음의 문턱에서야 절규의 형식으로 폭로된다. 그제야 ‘그이’가 자신을 ‘윤금실’이라 호명하는 이름 찾기의 서사가 밝혀진다. 그리고 독자는 그제서야 자기 자신을 밝히기를 마지 않는 인물이 자기 이름을 호명한 게 처음이라는 사실에 은근한 당혹감을 느끼게 된다.

한편, ‘그이’를 바라보는 ‘그녀’가 있다. 실상 소설 속 ‘그이’의 모든 이야기는 ‘그녀’로부터 진행된다. 이때, TV를 통해 ‘한 명’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 것이기에 ‘그녀’에게 윤금실의 이야기는 일방적 전달일 뿐 대화를 통한 정보일 수 없다. 하지만 ‘그녀’는 ‘그이’와의 대화를 상상하고, 그 환상 속에서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도 새로운 서술을 해내게 된다. 윤금실로부터 ‘나도 피해자다’라는 문장을 완성해내고, ‘나도 행복하고 싶다’는 생각에 이른다. ‘그이’를 통해 ‘그녀’의 욕망이 구체화 된다고도 서술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구체적 욕망의 끝에 ‘그녀’는 아흔셋에 이르러서야 자신도 자신의 삶을 누군가에게 고백하고 싶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그리고 윤금실을 찾아가고자 결심한다. 그제야 끝끝내 ‘그녀’로만 기록되던 그녀의 과거 회상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가 더해진다. ‘풍길’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기까지의 과정으로 이 소설의 서사를 정리해볼 수 있다면, 어떤 집단적 존재로서만 의미를 가지고 역사의 서술에서 잊힌 존재로밖에 서지 못했던 이름 없는 ‘한 명’이 자신의 존재를 계속해서 세상에 내세우고자 노력한 또 다른 ‘한 명’에 의해 자신의 목소리를 통한 새로운 역사를 서술하겠다는 의지를 다지게 됐고, 그제야 자신의 이름을 당당히 밝히게 됐다는 방식으로 소설의 서사를 구성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서사의 진행은 연대를 통한 개인의 공동체화란 측면에서 의의가 있다. ‘한 명’이라는 말에 관한 끈질긴 서술은 소설을 읽는 내내 개개인의 서사와 개별적인 증언에 몰두하도록 독자를 이끌지만, 결국 그 ‘한 명’의 이야기는 ‘여러 명’의 이야기이자 ‘위안부 피해자’라는 공동체의 역사다. 풍길의 기억이란 위안부 생활을 같이 해야 했던 무수한 소녀들의 기억을 제외할 수 없는 기억이다. 풍길이 애써 그때의 소녀들의 이름을 외우는 이유도 자신의 삶을 구성하는 데 있어 그들이 제외될 수 없다는 인식에 있을 것이다. 윤금실의 사투를 보며 증언의 용기를 얻고 ‘그이’에게로 나아가는 풍길의 마지막 행동 역시 윤금실과의 상상적 연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다면 소설의 ‘한 명’이란 공동체적인 의미로서 영원히 기억해야 할 ‘위안부 여성들’을 아우르는 말로 의미화될 수 있을 것이며, ‘한 명만이 남은 현실’ 또한 계속해서 한 명이 남아 역사의 아픔을 증언해나가는 장으로서 새로이 구성될 수 있을 것이다.

작가가 소설의 시작에 앞서 굳이 소설적 배경을 공지의 형식으로 밝혀두어야 했다면, 이는 그 허구적인 설정이 사실 정말로 닥쳐올 미래임을 충분히 인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위안부 피해자들의 생존은 영원한 것이 아니며, 정말로 단 한 명의 생존자만이 남는 상황이 닥쳐올 것이다. 이는 더는 아무도 남지 않게 되는 상황 역시 닥쳐올 미래임을 예시한다. 예측된 미래에 대한 소설적 글쓰기이기에, 김숨은 굳이 자기 소설의 배경을 서두에 기록해둔 것이다. 이는 여전히 생존해 그때의 고통을 담담히 설명하는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헌사이며 동시에 역사적 진실을 때로는 외면하거나 방관하는 독자들에 대한 위협과 경고이다.

하지만 본 작품의 의의를 이 미래에 대한 단순한 경고로서 우리에게 역사적 진실을 다시 마주해야 한다는 교훈적인 메시지만을 전달할 뿐이라고 일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가올 미래를 이야기하면서도 소설에 ‘기록되지 않은 한 명’이 같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기록되지 않은 한 명’이란 설정으로 인해 다시금 역사적 상처가 도드라지고, 다시금 역사적 상처의 서술 가능성이 생긴다. 윤금실과의 연대를 꿈꾸고 새로운 증인으로 나서고자 길을 나서는 풍길의 서사는 이 지점에서 희망적이고 낙관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기까지 한다. ‘생존해 계시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단 한 분뿐인 그 어느 날’이란 끝을 예정한 소설의 시작이 새로운 생존자가 등장해 다시금 기억의 역사를 이어나가는 새로운 시작으로 맺어졌기 때문이다.

끝나지 않을 이야기, 그녀들의 역사

언젠가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소설을 쓰고 싶었지만, 써지지 않으면 쓸 수 없겠구나 생각했다. ‘한 명’이라는 제목이 오고, 구해지는 대로 증언록들을 찾아 읽으면서 소설이 써지기 시작했다. 두려웠다. 피해자 한 분이 또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내 소설적 상상력이 피해자들이 실제로 겪은 일들을 왜곡하거나 과장할까봐, 피해자들의 인권에 손상을 입힐까봐 조심스럽고, 또 조심스러웠다.

(작가의 말, 본문 중 285페이지)

문학적 진실을 담아내는 과정에 주목하며, 소설의 앞머리에 적혀 있는 세 문장의 전제와 설정에 주목해 『한 명』을 분석하고자 했다. 그 비평의 끝에 작가의 말을 적어본다. 소설을 비롯해 여타 예술작품들을 감상할 때 작가의 말을 읽는 것을 꺼리는 사람이 많지만, 김숨의 이 작품만큼은 작가의 말을 읽어둬야 할 필요가 있다. 김숨 개인의 견해를 파악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녀의 고백은 작가로서 역사적 트라우마를 기록하고자 할 때 자연스럽게 하게 될 고민의 기록이다. 그리고 그 기록은 사실 새로울 게 없다. 어쩌면 당연한 망설임과 누구나 할 수 있을 법한 위안부 문제에 대한 관심의 촉구를 말한다. 그리고 지난 위안부 합의의 기만을 폭로하고 그분들의 행복을 바라는 기도를 올린다.

이 ‘작가의 말’을 읽어봐야 할 필요가 있다는 개인적인 판단은, 이 소설의 문학적 성과는 그리 높지 않다는 누군가의 평에 대한 일종의 변론이기도 하다. 문체에 대한 판단은 지나치게 주관적인 것일 수 있으나, 소설 곳곳에 미주가 달리면서 아마 대부분의 독자들은 소설이 매끄럽지 못하다는 인상을 받았을 것이다. 현재의 ‘그녀’가 살아가는 공간에 배치된 인물들과 ‘그녀’가 과거를 회상하도록 하는 매개체로서의 소재들이 조금 과하다거나 작위적이라는 생각이 일게 할 정도로 상징적이라는 문제나, 아마 작가가 하고 싶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위안부 피해 사실에 대한 현재화 작업이 ‘그녀’의 현재 이야기에 집중되며 과거 이야기와 현재 이야기가 미묘하게 분리되는 인상을 남긴다는 문제 역시 소설의 미학적 측면에서는 한계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이 한계는 어쨌건 기록돼야 한다. 크게 새로울 것이 없는 ‘작가에 말’에 주목해야 한다는 말은, 위의 한계를 전부 인정하더라도 이 소설이 지금의 국문학계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중대한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의의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이유에서 비롯됐다.

다시 소설에 대한 이 비평문의 판단을 정리해본다. 작가 김숨은 여러 생존자의 기억과 증언을 수집하고 이를 나름의 방식으로 새롭게 엮어내는 글쓰기 방법을 『한 명』의 서술 방식으로 택했다. ‘여러 명’의 이야기가 ‘한 명’의 이야기로 재구성되는 이러한 글쓰기를 통해 개별적인 조각으로 흩어져 있던 성노예 피해자들의 이야기가 공동체적이고 집단적인 총체로 결합될 수 있었으며, 그들을 특정 역사의 대상이 아닌 보편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으로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됐다. 한편,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커다란 역사적 트라우마를 기억의 구석으로 미뤄두고 방관하고는 하는 현재의 우리에게 경종을 울린다. 하지만 역사적 증언이 소멸될 위기에서 출발하는 소설이 새로운 증언을 해낼 또 다른 생존자의 결단에 도달하면서 단순한 경고로서만 이 소설을 바라봐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소설은 이전의 참상을 끝끝내 기억해내고 기록해낼 역사 서술의 영원함을 논하며 마무리된다.

결국 『한 명』이 보여주는 ‘일본군 성노예’의 역사는 종결되지 않을 이야기다. 그리고 실제로도 일본군 성노예 문제는 제대로 극복되지 않은, 현재로까지 이어지는 미완결의 역사다. 당시의 피해자들이 생존해 계속해서 그때의 아픔을 증언하고 있으며, 이는 기록될 역사의 측면에서도 그리고 극복되지 못할 트라우마를 극복하고자 분투하는 그들의 삶의 측면에서도 종결될 수 없는 말하기다. 김숨 역시 ‘작가의 말’에서 그 문제를 분명히 인지하고 있음을 보인다. 김숨은 한국 여성들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끔찍하고 황당한, 그리고 치욕스런 역사로 위안부 문제를 설명한다. 이 트라우마로서의 역사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가. 미완의 이야기로 영원히 남을 불완전한 역사를 온전히 바라보는 것은 가능한가.

기만적이라는 말을 할 수도 있겠으나, 결국 이에 대해 작가가 할 수 있는 것은 제3자로서의 ‘거리두기’일지도 모른다. 김숨은 자기가 논한 ‘소설적 상상력’으로 나름의 거리두기를 해내고 있다. 그리고 이 거리두기가 지금의 문학계가 역사를 바라봐야 할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이때의 거리두기란 결코 심정적 거리두기가 아닌, 어디까지나 트라우마적 역사를 지나온 개개인을 미시적 존재로서 남겨두지 않고 그들의 삶을 총체적이고 거시적인 역사의 하나로서 밝혀줄 수 있는 거리두기를 말한다.

마지막으로, 소설의 사회적 역할이란 원론적인 문제에 주목하다 보니 제대로 밝혀두지 못한 『한 명』의 핵심을 언급하며 글을 마치려 한다. 이 소설의 면면을 다각화하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은 모두 여성들의 고백이다. 소설에서도 확인할 수 있지만, 이때의 고백은 여성이기에 주어지는 세간의 온갖 편견을 이겨낸 선언적인 고백이다. 단순한 비극 정도로 일축되거나 여성에 부과되는 억제된 도덕관에 의해 지워진 상세한 이야기들이 여성들의 주체적인 말하기를 통해 역사에 편입되는 과정은, 편집된 사실이란 점에서 누군가의 편견과 선별이 개입됐을 수밖에 없는 기존의 역사 서술에도 커다란 균열을 일으킨다. 역사 서술이 일반적으로 ‘그들의 역사’, 즉 남성적 글쓰기임을 감안한다면, 위안부 할머니들의 고백과 그로 인한 역사 서술의 조정은 ‘그녀들의 역사’란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낸다. 김숨의 『한 명』은 ‘그녀들의 역사’에 주목한 ‘여성 작가의 글쓰기’로서, 변두리와 생략된 공간에서만 존재하던 여성들의 이야기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는 점에서도 중대한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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