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과 공감
법과 공감
  • 대학신문
  • 승인 2019.03.10 0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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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혜 강사

법학전문대학원

지난 수년간 학부에서 노동법을 가르치면서, 로스쿨 진학을 희망하는 수많은 학생을 만나 왔다. 왜 로스쿨에 가고 싶은지, 나아가 왜 법률가가 되고 싶은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면 거의 항상 듣는 부동의 1위 답변이다. “법으로 약자를 돕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법률적 지식과 날카로운 분석력, 그리고 약자에게 공감할 줄 아는 따뜻한 마음씨도 아울러 갖춘 법률가는 누가 보기에도 멋질뿐더러 학생이라면 한 번쯤 도전해 보고 싶은 직업일 것이다. 그런데 약자에게 공감한다는 것은 사실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약자란 누구인지, 공감한다는 행위의 실체는 과연 무엇인지 현실에서 부딪혀 보면 원래의 선입견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주노동에 대한 박사 논문을 쓰고 있을 때, 현실을 잘 알고 싶어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법률 자문을 한 적이 있었다. 당시 일하던 공장에서 큰 불이 나서 심각한 화상을 당한 분의 산업재해 보상 신청을 진행했다. 외국인에, 여성에, 산업재해 피해자에, 불법체류까지. 그는 내가 생각하던 ‘약자’의 모든 조건을 갖춘 완벽한 사람이었다. 보상금 책정을 위해 그간 일하면서 월급을 얼마나 받아 왔는지 물었다. 생각보다 적지 않은 액수에 놀랐다. 법률 자문을 하겠다고 앉아 있는 나보다 불법체류 외국인의 수입이 많음을 확인했을 때의 당혹감이란. 젊은 여성인데 얼굴에 화상을 입어 으레 불행하고 우울해할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시종일관 밝고 유쾌했다. 한국 여자들은 왜 항상 힘들게 사냐며 오히려 깔깔대고 필자를 놀려 댔다. ‘약자를 법으로 도와 보려고’ 매주 공단을 방문하던 나는 어느새 그에게 위로를 받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나보다 약하지 않았다.

우리 사회에 끔찍하리만치 많은 문제가 산적해 있는 것이 사실이고 구조적 불평등 속에서 절박하게 문제 해결을 해야 하는 취약한 사람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런 문제 속으로 기꺼이 뛰어드는 것은 분명 법률가의 소임이 맞다. 그러나 법의 토대는 추상적인 타자인 약자 - 즉 연약하며, 무력하고, 수동적으로 도움을 기다리고, 고마워할 줄 아는 - 그런 관념 속의 약자에 대한 온정주의가 아니다. 법률가인 당신에게 찾아 올 ‘약자’는 무례하고, 끈덕지며, 심지어 영악해서 당신을 당황하게 할지도 모른다. 적당히 선하고 적당히 악하기도 한 우리 모두의 모습인 것이다. 내 목을 조르려 하는 약자에게 따뜻한 마음으로 공감하는 것은 친절한 태도를 결심한다고 될 일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성립 불가능한 모순이다.

그래서 법의 기초는 낙관적 온정주의가 아니라 다소 비관적인 현실 인식에 터를 잡고 있다. 우리 모두는 삶의 어느 시점에서든 불행을 비껴가지 못한다. 아침마다 뉴스에서 접하는 사건 사고들이 나만 비껴갈 수는 없다. 커피 한 잔 마시면서 신문에 적힌 타인의 불행에 대해 읽고 동정하는 것은 그러한 현실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는 여유에서 나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동정에 기초한 공감은 피상적일 뿐 아니라, 지속 가능하지 못하다.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약자를 이해하고, 약자로 사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그 감정을 흉내내려는 것”의 위험성을 지적한다. 우리가 법을 통해 꿈꿔야 할 사회는 나쁜 일이 전혀 생기지 않는 요행 속의 천국이 아니라, 설령 불행하고 어려운 일이 닥쳤다 하더라도 다시 일어날 수 있게 하는 제도가 준비돼 있고 동병상련의 정을 나눌 수 있는 사회다. 약자를 동정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나도 약자가 될 수 있다는 현실 인식, 그것이 법에서의 공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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