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조직사업 전개해 나갈 것

지난 11월 28일(일) 명동성당 이주노동자 농성단의 해단식이 열렸다. 농성단을 비롯, 해단식에 참석한 모든 이들은「함께가자, 우리 이 길을」을 부르며 제2의 투쟁을 기약했다. 샴수씨(방글라데시, 41세)는 “어려울 때마다 함께 해준 사람들이 있어 지금까지 견딜 수 있었지만 더 이상의 농성은 힘들 것 같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산업연수생에게 노동자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기존 산업연수생 제도의 문제점이 사회일각에서 지적되자 정부는 2003년 8월부터 외국인 고용허가제(고용허가제)를 시행했다. 그러나 고용허가제에 따르면 이주노동자는 내국인 노동자와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 반면 사업장 이동의 자유가 없고, 1년마다 사업주와 재계약을 해야 한다는 제약을 받는다. 또 정부는 고용허가제의 실시와 함께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을 강제추방하겠다고 밝혀 큰 반발을 샀다.

2003년 11월 15일 정부의 합동단속이 시작되자 이주노동자들은 명동성당 등 각지에서‘강제추방 저지’와‘미등록 이주노동자 전면합법화’를 주장하며 농성에 들어갔다. 농성은 이주노동자 운동을 하던 4개의 단체에 의해 주도돼,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소규모로 진행됐다. 서울의 경우 ‘평등노조 이주노동자지부’(평등노조)는 명동성당에서, 시민단체 연합인 ‘외국인노동자대책협의회’(외노협)는 성공회 대성당에서, ‘서울조선족교회’ 등 종교단체는 종로3가의 기독교 연합회관에서 농성을 시작했고, 안산, 창원 등 이주노동자가 많은 지방에서는 그 지역의 이주노동자센터를 중심으로 농성을 시작했다.

사업장과 인근 지역을 벗어나기 힘든 이주노동자들은 지역별 소규모 투쟁에 그칠 수 밖에 없었고, 게다가 이주노동자들을 지원하는 각 단체마다 운동노선의 차이를 보여 큰 협력단체를 결성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평등노조 경인지역 이주노동자지부 서선영 사무국장은 “평등노조와 외노협은 명동성당에서 함께 농성을 시작했으나 노선 차이 등의 이유로 외노협이 성공회 대성당으로 농성장소를 옮겼다”고 말했다. 외노협 김민수 간사는 “평등노조는 합법적인 체류허가를 얻은 외국인이 스스로 일할 기업을 선택할 수 있는 노동허가제를 주장했고, 외노협에서는 우선 고용허가제를 정착시키고 점차 개선해 나갈 것을 주장했다”며 노선 차이가 있었음을 인정했다.

2월 초가 되자 명동성당 농성단을 제외한 대부분의 농성단은 농성활동을 중단했고, 명동성당 농성단도 처음 150여명에서 60여 명으로 그 규모가 축소됐다. 외노협 김민수 간사는 “11월 말까지였던 자진출국기간이 2월 말까지로 연장됐고, 자진 출국 할 경우 재입국을 허가하겠다는 정부의 약속도 받았다”며 “농성을 더 진행해도 새로운 성과를 얻을 수 없을 것같아 농성을 중단했다”고 말했다. 서울조선족교회 김용길 목사는 “재외동포법이 발효되고 2월 서울 조선족교회 농성장에 노무현 대통령이 방문하는 등 재외동포 처지가 개선될 것으로 보인다”며 해단 이유를 설명했다.

유일하게 남은 명동성당 농성단은 이후 집회나 대중 선전전과 함께 각 지역의 이주 노동자 조직화 활동을 하며 농성활동을 이어갔다. 그러나 가스총까지 동원한 정부의 단속추방과 생활고로 계속 힘을 잃어 해단 당시 농성단에는 20여 명 밖에 남지 않았다.

명동성당 농성단을 이끌었던 평등노조 서선영 사무국장은 “농성단을 떠나 이주노동자들이 있는 현장으로 가서 이주노동자들에게 조직의 필요성을 설득하고 한국인 노동자들에게도 연대를 호소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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