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 | 임현 소설가 신작 연재 소설 ③

<등장인물 소개>

수경. ‘나’와 유희의 친구. 어린 딸을 버스 전복 사고로 잃은 뒤, 이혼한 채 연고도 없는 전주에서 홀로 개를 키우며 살고 있다. 유희의 설득으로 일주일 정도 일본 동남부 지역으로 여행을 다녀오기로 한다.
수경. ‘나’와 유희의 친구. 어린 딸을 버스 전복 사고로 잃은 뒤, 이혼한 채 연고도 없는 전주에서 홀로 개를 키우며 살고 있다. 유희의 설득으로 일주일 정도 일본 동남부 지역으로 여행을 다녀오기로 한다.

 

유희. 수경에게 여행을 추천한 후, 출국 전날 수경과 함께 술을 마시며 거나하게 취한다. 수경이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고 일부러 우스꽝스럽게 행동한다. 
유희. 수경에게 여행을 추천한 후, 출국 전날 수경과 함께 술을 마시며 거나하게 취한다. 수경이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고 일부러 우스꽝스럽게 행동한다. 

 

‘나’. 소설가. 유희의 남편이다. 사고 이후 수경이 무언가 달라졌다는 것을 지각한다.
‘나’. 소설가. 유희의 남편이다. 사고 이후 수경이 무언가 달라졌다는 것을 지각한다.

 

이번 학기 『대학신문』에서는 임현 소설가의 신작 소설을 다섯 번에 걸쳐 연재합니다. 다음 내용은 1986호(5월 13일 자)에서 이어집니다.

5. 재작년 여름에 유희와 나는 시코쿠로 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몇 달 전 나는 수경의 남편이 연출한 단편영화에 출연하기도 했었는데, 불면증에 시달리던 남자에 관한 이야기였다. 의사로부터 잠자리를 바꿔볼 것을 처방받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그때 그 의사의 대사가 이랬다. 

“이를테면 좁고 아늑한 곳이 좋습니다.” 

‘이를테면’이라는 단어가 입에 붙지 않고 어색해서 이를테면, 이를테면, 하고 여러 번 연습했는데 정작 촬영에 들어가서는 “이를테면 좁고 아득한 곳이 좋습니다”라고 해버렸다. 누구도 무엇이 바뀌었는지 몰라서 그냥 넘어갔었다. 나중에 수경이 보내 준 파일을 유희와 같이 보며 우리는 한참을 웃었다. 뭐야, 표정이 이상해. 하나도 안 어울려 바보 같아. 내가 출연한 장면은 초반인 데다가 딱 그거 하나라 십오 분가량의 영화를 보는 내내 여길 찍을 땐 어땠는지,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뒤에 가서 주인공이 침대 밑으로 들어간다, 욕조에 들어가기도 하고, 옷장에 들어갔다가 결국엔 뚜껑 없는 맨홀을 오래 쳐다보는 걸로 끝날 거다, 신나서 호들갑을 떨었다. 

“여기 이 사람도 배우야. 여기 이 사람, 개를 끌고 가는 이 남자.” 

정지된 화면에서는 주인공이 맨홀을 바라보고 있었다. 초점이 흐려서 잘 보이지는 않았으나 털이 하얗고 체구가 작은 애완견과 반바지에 긴 셔츠를 입은 남자가 그 뒤로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유희는 그게 하나도 신기한 것 같지 않았다. 남자도 그것 외에 나오는 장면이 없어서 촬영하는 대부분 일손을 거들거나 나와 잡담했었다. 보이는 것보다 나이가 많아서 놀랐는데 본래는 경기도 어디서 식당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때는 서로의 이름을 묻고 누구 씨, 누구 씨 불렀으나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유희에게 그 남자에 대한 것도 모두 들려주었다. 친구랑 같이 시작했는데 지금은 혼자라고 하더라, 재능은 없는데 진지한 사람이었다, 나는 한 번에 끝났는데 이 사람 때문에 여기서 다섯 번인가 여섯 번을 다시 찍었어. 영화는 하루를 꼬박 촬영한 것 치고는 전체적으로 아쉬웠다. 그런 생각이 들고 보니 이런 일은 진짜 할 게 못되는구나 싶었다. 수경 내외에게까지 그런 말을 전하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당시 나는 그 단역 배우로부터 시코쿠 여행을 추천 받았다. 한 주 일정으로 온천과 우동이 유명하다는 지역에서 출발하여 항구 쪽으로 이동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대체로 관광을 할 만큼 대단할 것은 별로 없었다. 작은 규모의 소읍들이었고, 보이는 것들 대부분이 예상할 수 있을 만한 것들뿐이었는데, 다만 이동하는 길에 보았던 댐은 오래 기억에 남았다. 유희도 나도 실제로 댐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라 물이 검다, 섬이 가깝다, 그게 강의 본류나 바다라 생각할 뿐 무엇인지도 모르고 좋아했었다. 

전날 비가 온 탓에 응달은 아직 젖어 있었고 양달은 더웠다. 유희는 멀리 갔다가 너무 멀리 가나 싶어서 부르면 돌아왔는데 어느 순간이 지나면 다시 우리의 간격이 더 멀어져 있었다. 나는 덜 젖고 덜 더운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유희를 기다렸다. 댐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전망대가 있어서 거기서 물보라를 일으키며 방류되는 것을 오래 바라보았는데 어디선가 사이렌이 들려 돌아보자 견인차가 지나가는 게 보였다. 우리가 있는 곳에서 도로가 가까웠다. 유희는 전혀 개의치 않고 무언가에 몰입하고 있어서 그대로 내버려 둔 채 나는 또 내 나름대로 전망대를 홀로 돌아다녔다. 망향비의 새겨진 글을 훑어 읽고 독립문이나 지석묘처럼 생긴 조형물을 구경했다. 목재인가 싶어 조경 울타리를 만져보았는데 차갑고 단단했다. 전망대는 넓고 비어 있어서 대부분은 주차장으로 쓰이는 공간이었는데 가장 좋은 자리에 트럭이 있어서 간식류를 팔았다. 그밖에 주차된 차가 많지 않아 황량했다. 다른 건축물이라고는 관리사무소와 공용화장실이 일렬로 붙어 있는 것뿐이었다. 

거기 들어가 나는 마실만 한 음료를 사 왔다. 돌아왔을 땐 유희는 망향비 앞에 서서 이번엔 거기에 몰입하고 있었는데 음료를 건네도 받지 않고 여기 봐봐, 이거 뭐라고 읽는 거야? 하고 물었다. 그러나 내가 읽을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고, 읽을 수 있는 글자라고 하더라도 의미를 완전히 해독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한국으로 돌아와 나는 한동안 시코쿠에 관한 기사를 자주 검색했다. 그때 우리의 동선이 잘 그려지지 않을 때 주로 그랬는데, 그와 관련한 글을 쓰는 동안에는 누가 묻더라도 요즘 그런 걸 쓰고 있다고 말하진 않았다. 전에는 말하고 다녔으나 그때는 그렇게 되어버렸다. 다들 시코쿠, 하면 모두가 비슷하게 떠올리는 것들이 있어서 어렵겠다, 라든지 그건 좀 그러지 않나, 같은 반응이었다. 어딘가 불경스러운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일 테고, 그렇긴 해도 누군가는 하게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내가 해도 무방한 것 아닌가, 설명하고 설득하는 게 어려워서 언젠가부터 말하지 않게 되었다. 사실은 무언가로 쓰기에 시코쿠는 제법 괜찮은 소재라는 게 가장 큰 이유겠지만 이런 걸 어디서고 솔직하게 말한 적은 없었다. 그 무렵, 시코쿠를 검색하면 대부분은 터널 사고와 관련된 내용이었다. 우리가 여행한 곳과 몹시 가까웠으나 직접 볼 수는 없었다. 팔월이었고 무너졌는데 터널이 해안으로 이어지는 가장 빠른 길이어서 여름휴가를 떠난 사람들도 함께 매몰되었다고 했다. 사고가 있고 얼마 후에 이런 문장을 스크랩해 둔 적이 있었다. “터널 참사는 일본 사회 구조적 모순의 표출이다”라는 제목의 신문 사설이었는데 “…몇몇 악당이 벌인 사건이 아니다. 만일 그런 성격의 사건이었다면 문제는 복잡하지 않다. 문제를 쉽게 풀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건 일본 사회 그 자체가 빚어낸 비극이다. 예외적 사건이 아니라는 뜻이다. 사회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또 어떤 비극이 닥칠지 모른다. 우리가 위험사회를 벗어날지는 이 비극을 얼마나 깊이 성찰하느냐에 달려 있다.” 나는 여기에 ‘예외적 사건’에 밑줄을 긋고 ‘성찰’이라는 단어 주위에 동그랗게 강조 표시를 해두었었는데 다시 읽고 보니 다소 평범한 논조라는 인상이었다. 비장하고 정치적이었다. 

사고 전의 시코쿠에 관해서라면 주로 개인 블로그나 그와 비슷하게 운영되는 여행정보지 들에서만 다뤄졌다. 가볼 만한 명소를 소개하는 기획 기사라든가 여행자들이 개인적으로 찍은 사진들이 많았다. 사진 속에는 사람들이 가로로 두 줄, 세 줄씩 길게 서 있거나, 도시락을 먹거나,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가깝게 찍은 꽃이나 나뭇잎, 벌레, 식물도감에나 나올 것 같은 그런 거. 아니면 전체적으로 멀리 풍경을 조망하는 것들뿐이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일주일을 머물렀다. 사람들이 친절한 데다가 낯설고 괜찮은 곳이라고 유희는 자주 회상했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무엇이 좋은지, 어디가 가장 가 볼만 했었는지 구체적으로 물으면 분위기가 그랬다, 찍어둔 사진을 모두 지워버려서 아깝다, 같은 말만 계속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여행에서 돌아오던 날, 우리는 수경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사고 소식이었고, 짐을 정리할 시간도 없이 곧바로 병원을 향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것으로 뭐든 써보기로 마음먹었었다. 이듬 해 삼월인가 사월인가. 쓰기로 한 게 그랬다는 거고 막상 쓰고 보니 어려워서 한두 달이 금방 지났다. 서너 달은 잊었다가 여서일곱 달쯤 되고 보니 결국엔 그렇게 되는구나 싶게 다시 시코쿠에 대해 쓰게 되었다. 괜히 이런 걸 쓰는 건가 싶었다. 처음 의도와 달라진 부분이 생기고 나중에는 이 모든 일들이 내게는 나름의 관련성을 갖게 되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수경의 남편이 연출한 영화에 출연하고, 그로부터 얻은 여행 정보를 토대로 여행을 하고, 그곳에서의 사고와 한국으로 돌아와 들은 또 다른 사고 소식이 내게는 어쩐지 무언가로 연결된 것처럼 느껴졌다. 물론 쓰는 동안, 나중에 수경이 이걸 보게 된다면 뭐라고 변명해야 하나, 염려되기도 했으나 그래도 수경이라면 이해할 것 같다는 쪽으로 굳혀버렸다. ▇

 

임현 소설가

»2014년 「현대문학」 등단

»단편집 『그 개와 같은 말』

»제8회 젊은작가상 대상(2017) 수상

»제9회 젊은작가상 본상(2018) 수상

 

삽화: 송채은 기자 panma2000@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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