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소연 부편집장
문소연 부편집장

얼마 전 「한겨레신문」에서 인문학 전공자들에 대한 혐오 표현이 확산되고 있다는 기사를 봤다. 인문대생을 과녁으로 삼은 저격은 그 내용도 다양했다. ‘문레기’ ‘문과충’이라는 온갖 암울한 합성어를 보고 있자니, 처음에는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다가도 순간 서늘한 현실 감각이 몰려왔다. 이런 부정적인 인식은 이제는 하나의 사회현상이라고 불려도 될 만큼, 사람들의 잠재의식 속에 깔려있다. 각종 커뮤니티에 접속하는 순간 여실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참 터무니없다고 생각해 혀를 끌끌 차면서도 반박하기는 쉽지 않았던 짧은 댓글이 생각난다. 커뮤니티 ‘에브리타임’에서 본 댓글이었는데, 자신이 이과라는 자부심에 절어 있는 글이었다. 

주변 사람들이 내 전공에 대해 보이는 반응은 다양하다. 첫 번째,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다. 복수전공하는 학과의 전공과목 수업에서 담당 강사님과 일대일로 상담을 할 시간이 있었다. ‘서양사를 전공하는 것이 앞으로 타전공 과목에서 네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하는 선생님의 말씀이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앞서 언급한 기사에 ‘인문학이 왜 필요한지를 입증한다’는 댓글에 수많은 ‘좋아요’가 달리는 것을 보고, ‘인문학이 삶의 거름이 된다’라는 입에 발린 말을 듣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나는 애써 인문학도들의 용기를 북돋으려 하는 상투어구 쯤이 아닌가하는 삐딱한 생각이 먼저 든다. 그 이유는 두 번째 반응에 있다.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이들이다. 그들은 명절 때 친척들이 모인 자리에서 오고가는 대화 속에서 은근슬쩍 출현한다. ‘뭐 먹고 살거냐’ ‘사학과 나오면 뭐 해설사 그런 것이나 하냐’ 이런 외적인 반응은 곧 나 자신을, 그리고 내 동기들을 자기혐오의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 넣는다. 

이 사회는 유용성과 효율성을 추구한다. 그 지점에서 문과와 인문학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탄생한 듯하다. 그러나 인문학에서 유용성과 효율성을 찾기 쉽지 않다. 인문학에서 유용성을 찾기 시작한 순간 인문학의 정체성은 사라진다. 인간은 끊임없이 쓸모없음을 추구하기에 인간을 다루는 학문인 인문학 역시 쓸모없음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애초에 유용성과 인문학은 그 궤를 같이할 수 없는 것이다. 

인문학의 그런 본질을 알면서도 나는 그런 인식에 ‘아니다’라고 당당히 맞설 자신이 없다. 부질없는 우월 의식에 던질 돌이 없다. 학문의 유용성을 따지는 것이 그리 의미 있는 질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재고 또 재게 됐다. 유용성이라는 기제에 점차 매몰돼가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인문학을 철저히 이용해왔다. 특히 고등학교 때 수시를 준비하면서 그래왔다. 처음에는 사학과에 진학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하지만 3년간 내 생활기록부는 사학과에 지원하기 위한 각종 스펙들로 채워졌고, 인문학도가 되길 갈망하는 척 어색하게 연기해왔다. 고된 연기 끝에 그렇게 이 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시작부터 잘못됐기에 허무함과 무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생산성만을 추구하는 사회에서 인문학적 지식을 기반으로 한 콘텐츠가 필요하다’는 이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잘 빚어진 말은 나에게 전혀 와 닿지 않는 말이다. 내년이면 졸업을 바라보는 22살의 입장에서는 적어도 그렇다. 따라서 이 글에서 아무 의미 없는 희망찬 말을 외치고 싶지도 않다. 나는 유용성의 바다에서 침전하지 않기 위해서 부단히 발을 휘저어야 한다. 그것이 판을 이리저리 벌이고 다니는 이유다. 그러다 보면 부질없는 우월 의식에 던질 돌이 생겼다고 느낄지도 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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