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1일 헌법재판소(헌재)는 낙태한 여성을 처벌하는 규정인 형법 269조 1항과 동의를 받아 낙태 시술을 한 의사를 처벌하는 규정인 270조 1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아울러 내년 12월 31일까지는 낙태죄 관련 조항을 개정하도록 했다. 이런 상황에서 낙태가 합법화될 경우 의사가 개인적 양심에 따라 낙태 시술을 거부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주장이 일부 산부인과 의사들에 의해 제기됐다.

현행 의료법에 따르면 의사는 정당한 사유 없이 진료를 거부하지 못하며, 이를 위반할 경우 1년 이하의 징역형이나 1,000만 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진다. 현재 보건복지부의 해석에 따르면 의료인 개인의 종교적 신념 등은 ‘정당한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 환자의 치료받을 권리와 생명권이 의료인 개인의 신념보다 우선해야 하기에, 이와 같은 판단은 일반적으로 매우 타당하다. 그러나 낙태 시술 거부에 대해서도 동일한 판단이 이뤄져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재고가 필요하다. 양심에 따라 낙태 시술을 거부하는 의사에게 법적으로 낙태 시술을 강제할 때 얻을 수 있는 환자의 권익과, 그로 인한 침해당한 의사 개인의 권리에 대한 경중을 심각히 고려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헌재는 낙태죄에 대한 헌법불일치 판단의 근거 중 하나로 “낙태 갈등 상황에서 형벌의 위하(위협)가 임신한 여성의 임신종결 여부 결정에 미치는 영향이 제한적이라는 사정과 실제로 형사처벌되는 사례도 매우 드물다는 현실에 비춰보면 자기낙태죄 조항이 낙태갈등 상황에서 태아의 생명 보호를 실효적으로 하지 못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는 점을 적시했다. 낙태죄가 실효성은 없으면서 낙태를 불법으로 규정함으로써 발생하는 폐해가 많음을 고려한 것이다. 이와 같이 낙태가 불법인 상황에서도 많은 산부인과 의사들은 낙태 시술을 해 왔고, 형사적인 처벌을 받는 일도 거의 없었다. 낙태가 합법화된다면 그동안 불법이라서 낙태 시술을 하지 않았던 의사들도 가세할 것이다. 때문에 낙태를 원하는 사람이 의사가 없어서 적절한 시기에 낙태를 못하게 될 가능성은 없다.

이에 비해 무엇보다 태아의 생명권이 우선돼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의사에게 낙태 시술을 강제한다면, 의사이기 이전에 개인으로서의 양심과 권리를 크게 침해하게 된다. 개인적 신념이 강한 의사는 형사적 처벌을 감수하더라도 낙태 시술을 거부할 것인데, 이 경우 낙태 시술을 받고자 하는 환자의 권리 보호 효과는 전혀 없게 된다. 처벌이 두려워 자신의 양심에 반하는 낙태 시술을 감행하는 의사는 그 자체만으로도 양심에 따른 자유를 침해당하게 되며, 심한 경우 살인과 비슷한 수준의 윤리적 트라우마를 겪을 수도 있다. 또 마지못해 시술을 하는 의사의 행위가 환자의 안전과 건강에 위해가 될 가능성도 있어 환자 권리 보호에 역행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낙태 관련 법조항의 개정을 둘러싸고 여성의 자기결정권 보호 문제만이 부각되고 있지만, 그로 인해 침해받게 되는 소수 의사들의 양심의 자유 역시 충분히 고려돼야 한다. 따라서 개인적 양심에 따른 의사의 낙태 거부권을 인정하는 한편, 낙태를 원하는 이가 적정한 시기에 낙태 시술을 받는 데 장애가 없도록 유능한 의사를 쉽게 찾을 수 있게 하는 장치가 마련되는 방향으로 입법 및 법안 개정이 이뤄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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