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연대기, 사회의 연대기
개인의 연대기, 사회의 연대기
  • 황예정 기자
  • 승인 2019.11.17 08: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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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 연극 〈알리바이 연대기〉

모든 이들은 매일 자신만의 역사를 써 내려간다.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먹고, 무슨 일을 했는지 따위의 소소한 사건들은 모여서 개인의 역사를 만들고, 이는 곧 그가 살아가는 사회의 역사를 반영한다. 때로 개인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시대의 풍랑에 휩쓸리기도 한다. 그때 우리는 질문하게 된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사진제공: 국립극단
사진제공: 국립극단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그런데 살면서 보니까 어떻게 사느냐, 어떻게 죽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더라고”

지난 10일 막을 내린 국립극단의 연극 〈알리바이 연대기〉 속 ‘아버지’는 평생 이 질문을 두고 고민한 인물이다. 김재엽 작가 겸 연출의 실제 가족사를 바탕으로 만든 〈알리바이 연대기〉는 한 개인의 사적인 연대기를 통해 한국 현대사의 연대기를 드러낸다. 극은 재엽이 공익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던 날 아버지가 눈물을 흘리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한다. 당시에는 그 의미를 알지 못해 의아해하던 재엽은 아버지의 삶에서 눈물의 의미를 풀기 위한 ‘알리바이’를 발견해 나간다.

극은 재엽의 아버지와 주변 인물들의 삶을 비춘다. 1막 ‘아버지의 연대기’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청년기까지의 아버지의 일생을, 2막 ‘아버지와 두 아들의 연대기’에서는 아버지와 재진, 재엽 형제의 삶을 그려낸다. 3대에 걸쳐 이어지는 한 가문의 역사는 일제강점기부터 김대중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큰 호흡으로 훑는다. 

“진실과 함께할 수 없으니 자꾸 알리바이를 꾸며대는 거야” 

전쟁과 쿠데타로 얼룩진 시대의 진실은 쉽게 은폐됐고, 아버지는 한국 사회에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생존 전략을 택한다. 바로 ‘가운데 서기’다. 다수의 편에 속해 튀지 않는 것이야말로 ‘빨갱이’라는 손가락 총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또한 아버지가 평생 모았던 외국어 교과서에 대한 애착은 대한민국이 아닌 다른 미지의 세계에 뿌리내리고자 하는 ‘경계인’으로서 삶을 암시한다. 개인의 생존 전략으로서의 일상적 알리바이는 유신 헌법, 장준하 선생의 의문사 등 정치인들이 권력을 연장하기 위해 꾸며낸 정치적 알리바이와 이어지며 일련의 연대기를 이룬다.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어”

아버지뿐만 아니라 두 아들의 삶도 역사의 일부가 된다. 서울대 프락치 사건, 5·18 민주화 운동 등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은 개인의 삶에 스며들어 일상의 모습을 바꾼다. 하지만 이처럼 다루는 사건이 매우 무겁고 정치적임에도 극이 부담스럽지 않은 이유는 이를 평범한 개인의 시선을 통해 바라보기 때문이다. 극의 편안한 분위기는 감정을 절제하고 담담하게 이야기를 털어놓는 듯한 배우의 연기를 통해 강화된다. 배우들은 아버지의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에도 눈물을 흘리거나 격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다만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줄 뿐이다. 그러나 이는 관객이 그들의 심정을 짐작하게 함으로써 감정을 직접 드러내 보여주는 것보다 더욱 진한 여운을 남긴다. 

아버지 역의 남명렬 배우와 재엽 역의 정원조 배우는 서술자와 인물을 번갈아 연기하며 이야기의 안팎을 자유롭게 오간다. 다른 배우들도 일인다역을 소화하며 안정적인 연기를 선보인다. 특히 지춘성 배우는 아버지와 재진, 재엽의 어린 시절 등 매우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는데, 배역이 전환되는 것을 고스란히 노출함으로써 웃음을 유발하고 분위기를 환기한다. 이처럼 배우가 극의 안팎을 넘나들고 배역 전환을 노출하는 연출은 관객이 서사에 몰입하는 것을 방해함으로써 극을 더욱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주제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게 한다. 

“음~ 생각을 말아요 지나간 일들은” 

1막과 2막의 배경에 반복적으로 깔리는 김정호의 노래 〈하얀 나비〉는 김재엽 연출의 아버지가 실제로 좋아했던 노래로 자신의 일대기를 돌아보며 인간이 갖는 소회를 대변한다. 그러나 ‘가운데 서기’라는 아버지의 삶은 오늘날의 한국 사회에 여전히 ‘생각할 것들’을 남긴다. 남과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이 낙인찍히는 사회에는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역사를 바로잡아줄 개인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대가는 고스란히 개인의 몫으로 돌아온다. 우리는 개인의 일대기를 위해서 사회의 연대기를 되살피고 곱씹어야 한다. 연극 〈알리바이 연대기〉는 극장 밖을 나서는 우리에게 ‘어떻게 살 것인가’를 끝없이 질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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