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의 문턱 낮추기, 사람 간 문턱 없애기
극장의 문턱 낮추기, 사람 간 문턱 없애기
  • 이민주 기자
  • 승인 2019.11.24 07:4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취재 | ‘제로셋 프로젝트’를 통해 극장의 배리어를 발견하다

전자저울의 제로셋 버튼은 저울에 놓인 물체의 무게를 ‘0’으로 설정한다. 이 ‘제로셋 버튼’을 통해 사회문화적으로 당연시되는 명제를 재고해보자는 의미를 담은 ‘제로셋 프로젝트’(0set Project)는 2016년부터 ‘극장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다’라는 명제를 고민해왔다. 이들은 평소 비장애인이 인지하지 못했던 극장의 배리어*뿐만 아니라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에 존재하는 배리어를 재조명한다.

닫힌 극장, 닫힌 기회

국내에는 배리어프리가 도입되지 않은 극장이 대다수다. 대학로 공연장이나 남산예술센터, 삼일로 창고극장 등은 장애인의 접근을 고려하지 않은 채 설계된 대표적인 극장이다. 제로셋 프로젝트가 진행한 ‘대학로 공연장 및 거리 접근성 워크숍’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총 120개의 대학로 공연장 중에서 장애인이 접근 가능한 곳은 14곳에 불과했다. 그러나 현행법상 1999년 이전에 완공된 건물이나 300석 이하의 공연장은 시설 개선 의무를 지지 않기 때문에 극장의 자발적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에 제로셋 프로젝트는 연극이나 전시의 형식을 빌려 극장의 접근성 문제를 조명한다. 이들은 공연 〈불편한 입장들〉(2017), 워크숍 〈걷는 인간〉(2018) 및 공연 〈나는 인간〉(2018), 공연 및 전시 〈관람 모드–보는 방식〉(2019)을 진행하며 각각 남산예술센터, 대학로 공연장, 삼일로 창고극장을 살펴봤다. 극장을 모니터링하기 위해 이들은 경사로의 기울기, 출입구의 통과 유효 폭, 점형 블록의 설치 여부, 점자 안내판이나 음성 안내 장치의 유무 등을 고려한 매뉴얼을 제작한다. 제로셋 프로젝트의 연출 신재 씨는 “물론 매뉴얼이 모든 개인의 특성을 반영할 수는 없다”라면서도 “장애인이 공연장에 올 수 있는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것이 매뉴얼의 목표”라고 이야기했다.

또한 제로셋 프로젝트는 장애인이 공연을 관람하는 것만큼이나 공연을 창작하는 데도 불편을 겪는다는 것에 주목한다. 실제 2018년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의 ‘장애인 문화 예술 창작 활동 실태조사’에서 장애인은 예술 활동 공간 이용 시 가장 어려운 점으로 ‘공연의 공간 구조가 예술 활동에 부적합함’(26.4%)을 지적했다. 신재 씨는 “삼일로 창고극장은 장애인이 무대에 오를 수는 있어도 연습실이나 분장실은 이용할 수 없는 구조”라고 극장의 현 상태를 진단했다.

‘제로셋 프로젝트’의 공연 및 전시 〈관람 모드-보는 방식(2019)〉이 진행된 삼일로 창고극장의 모습이다. 사진제공: 제로셋 프로젝트, 이영건 사진 작가
‘제로셋 프로젝트’의 공연 및 전시 〈관람 모드-보는 방식(2019)〉이 진행된 삼일로 창고극장의 모습이다. 사진제공: 제로셋 프로젝트, 이영건 사진 작가

극장이 변화하기까지

제로셋 프로젝트에서는 비장애인이 극장 개선에 함께 참여한다. 〈불편한 입장들〉은 관객이 직접 남산예술센터 시설의 접근성을 살펴보는 참여형 프로젝트다. 관객은 극장 모니터링 체크리스트를 받아 접근로와 매표소 등 극장 입장 시설을 둘러본다. 이후 이들은 한곳에 모여 각자의 관찰 결과를 공유하며 남산예술센터의 도면을 수정해나간다. 신재 씨는 “극장은 비장애인의 시선에서 구성된 공간”이라며 “비장애인이 평소 보지 못했던 극장의 모습을 발견할 기회를 마련해주고 싶었다”라고 참여형 프로젝트의 취지를 설명했다. 

전시 <관람 모드–보는 방식>도 삼일로 창고극장을 전시 공간으로 삼아 비장애인 관객의 참여를 유도한다. 제로셋 프로젝트는 전시를 위해 극장 곳곳에 마스킹 테이프를 부착함으로써 이동 통로나 문턱의 너비를 표시한다. 또한 이들은 엘리베이터나 출입구 등의 시설에 장애인 이용 가능 여부도 적는다. 신재 씨는 “비장애인이 극장 접근성 개선 프로젝트에 참여해도 극장의 모든 배리어를 인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라며 “적어도 극장이 배리어가 존재하는 공간이라는 것을 상기해주고자 했다”라고 전시의 계기를 밝혔다.

제로셋 프로젝트는 모니터링 과정에서 발견한 문제를 바탕으로 극장의 리모델링을 제안하기도 했다. 2017년 제로셋 프로젝트는 국가인권위원회에 ‘공연장 시설 및 제도 개선을 위한 정책 권고 진정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이 진정서는 구체적인 피해와 피해자가 없다는 이유로 각하됐다. 이후 이들은 워크숍 〈걷는 인간〉에서 발견된 문제를 토대로 2018년 5월 다시 국가인권위원회에 ‘대학로 공연장 시설 접근성 전수 조사 요청 진정서’를 제출해 대학로 공연장의 전면적 검토를 요청했다. 신재 씨는 “대학로 극장은 대부분 소유주가 따로 있고 재정 상태가 열악하다”라며 “따라서 극장이 변화하려면 개인뿐만 아니라 정부가 시설을 개선할 의지를 지녀야 한다”라고 요구했다.

창작자와 관객이 만나

제로셋 프로젝트에서는 장애인이 직접 공연을 창작하기도 한다. 〈나는 인간〉은 그간 공연에서 배제돼온 ‘장애’라는 주제를 다루는 장애인 연극이다. 〈나는 인간〉의 배우는 하늘을 나는 동작을 표현하면서 장애인은 스스로가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나는 것만큼 어렵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신재 씨는 “장애인은 자신을 드러내야만 인간이라는 것을 인정받는다”라며 “〈나는 인간〉은 비장애인에게 당연한 인간적인 삶이 장애인에게는 쉽지 않다는 이중적 의미를 담은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또한 제로셋 프로젝트의 공연에서는 창작자와 관객이 일대일로 만난다. 올해 공연 〈관람 모드–보는 방식〉의 배우는 시각 장애인, 청각 장애인, 휠체어를 이용하는 언어 장애인, 비장애인으로 구성돼있다. 기존 연극에서는 관객이 객석에 앉은 채 메시지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관람 모드–보는 방식〉의 관객은 공연 내내 움직이며 창작자와 대화한다. 신재 씨는 “공연을 관람하는 동안 관객은 계속 이동해야 한다”라며 “이런 불편한 태도를 통해서만 관객이 자신이 아닌 타자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이 공연에서 장애인은 창작자로서의 고민을 관객과 공유한다. 평소 장애인은 보호가 필요한 연민의 대상으로 인식되는 반면 공연 속 장애인은 개별적인 인간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신 씨는 “비장애인은 장애인 한 명에 대한 인상을 장애인 집단으로 쉽게 일반화시키곤 한다”라며 “구체적인 인간으로서의 장애인을 보여주는 것이 연극의 목표”라고 이야기했다.

제로셋 프로젝트는 배리어프리(barrier-free)와 함께 배리어컨셔스(barrier-conscious)에 주목한다. 이들은 극장의 배리어를 없애려는 노력만큼이나 계속 생겨나는 배리어를 의식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여전히 비장애인의 시선으로 구성된 극장에서 장애는 부가적인 요소에 불과하다. 신재 씨는 “여태 배리어프리 요소는 기존에 만들어져 있던 공연에 첨가될 뿐이었다”라며 “공연을 제작하는 단계부터 작품에 배리어프리적 요소가 반영될 수 있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제로셋 프로젝트와 같은 극장 곳곳의 배리어에 주목하는 시선이 늘어나길 기대해본다.

*배리어(barrier), 배리어프리(barrier-free): 배리어는 장애인, 고령자 등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가 맞닥뜨리는 물리적·제도적 장벽이며, 배리어프리는 이 장벽이 사라진 상태.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