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성

김시온(법학전문대학원)

 

침묵이 젖어들 때 식물은 허공을 움켜쥐면서 태어난다

 

할머니는 자라나는 잎에 나의 기쁨과 슬픔에 대해 써놓고서는 모두 잊어버렸다

 

그래도 나는 잘 웃고, 잘 울고, 종종 그녀를 잊고

 

늦게 걷는 그녀가 답답해 고목나무 주위를 몇 바퀴나 빙빙빙 달리던 시절

천천히가 죽기보다 싫었고

만만하다는 게 그보다도 싫어서 죽음을 아름답게 노래하니

 

무슨 일이니, 무슨 일이냐, 그런 나무껍질 같은 걱정에,

아무 일도 없는데 어떤 말도 싫어서

 

버팀목을 뱀처럼 빽빽히 감아내던 줄기처럼

더 이상 꼬아낼 절망이 없어 불행하다고 여기던 마음

 

물만 뿌려도 게걸스레 자라나는 게 당연해서

어딘가 줄어드는 게 있다는 것도 몰랐다

아래로 내려가는 뿌리같다고는 했지만서도

 

이파리 몇개의 날개짓만으로 영원히 떠나버리는 것

 

가끔 악수하듯 하나씩 더듬어보는 잎맥,

거기엔 검버섯 피어난 살갗처럼 바싹 타들어간 빛만이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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