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탄생 250주년, 그는 무엇을 남겼나

오희숙 교수(작곡과)
오희숙 교수(작곡과)

올해는 베토벤 탄생 250주년이 되는 해다. 베토벤 음악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피아노를 전공하던 대학 시절, 내게 베토벤은 무시무시한 32곡의 소나타였다. 한 곡, 한 곡이 모두 개성이 넘치고 특별했기 때문에 그의 전곡 소나타를 연주한다는 것은 감히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과제로 받은 한 곡의 소나타를 가지고 한 학기 내내 씨름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래도 슈나벨(A. Schnabel)의 전설적인 전곡 연주(1932, 음반)에 매료되고 굴다(F. Gulad)의 센세이셔널한 음반에 충격을 받으며 베토벤에 다가섰고, 황동규의 수필을 읽으며 그의 세계에 더 깊이 빠져들었다. “베토벤의 소나타 30번은…약간 두근대며 듣다 보면 끝머리의 화려한 종지부 없이 끝나는 줄 모르게 끝나는 곡이다. (그렇게 살다 가고 싶다) 속도가 느리면서 극히 서정적인 아라우 연주의 그 곡 속에는, 늘 바람 센 미시령의 어느 바람 없는 날 무한 곡선의 호랑나비가 날기도 하고, 몇 해 전 방문했던 이태리 피렌체 근처에 있는 시에나 두오모 성당, 오후 2시 30분 햇빛이 정면으로 쏟아져 들어와 스테인드글라스의 모자이크들을 모두 지우며 성당을 온통 빛으로 채우고, 그 빛 속에서 그야말로 온몸으로 무한을 느낀 체험이 재현되기도 했다.”(황동규, 『지음(知音)의 세계』) 소나타로 시작한 베토벤의 세계는 독일 유학 시절 실내악곡과 교향곡으로 넓혀졌고, 좁은 골목 속 음반가게를 다니며 LP판을 모으는 재미에 빠지기도 했다. 그렇지만 연주자에서 음악학자로 포지션이 바뀌면서 베토벤을 보는 나의 시각 또한 확연히 달라졌다. 그의 작품에 담긴 ‘의미’를 찾게 됐고, 그렇게 나에게는 새로운 베토벤의 세계가 펼쳐졌다. 그 안에서 베토벤 ‘신화’에서 드러나는 철학적 의미, 그리고 이와는 상반되게 정치적 이데올로기 속에서 등장한 베토벤의 상징성은 지금까지도 내게 중요하게 남아있다. 

〈베토벤(Beethoven)〉, 막스 클링거(Max Klinger)
〈베토벤(Beethoven)〉, 막스 클링거(Max Klinger)

 

신화(神話)와 철학이 된 베토벤

베토벤은 당대부터 오늘날까지 공인된 ‘천재’로서, 음악의 분야를 넘어서서 인류 전체에게 ‘영웅’으로 인정받아 왔다. 이러한 베토벤 신화의 중요한 출발점은 1875년 조각가 클링거(M. Klinger)가 베토벤 사후 75주년을 기념해 만든 조각상이다. 비평가 크리거(V. Krieger)가 이 조각상에 대해 묘사한 글은 베토벤의 영웅적 모습을 실감 나게 보여준다. “비록 예술가는 신적인 존재는 아니지만, 다른 모든 인간보다 신적인 것에 더 가까운 존재로 여겨졌다. 우수에 잠긴 태도나 내면을 향한 시선은 베토벤의 창조성과 관계가 있다. 베토벤의 천재적이고 창조적인 능력은 비극적인 동시에 영웅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크리거, 『예술가란 무엇인가』) 이 글에서 크리거는 ‘복음사가 요한’ ‘주피터’라는 용어로 베토벤을 평했고,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베토벤은 ‘신적인 존재’ ‘프로메테우스적 영웅’ 등으로 수용됐다. 단순히 작곡가가 아니라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최고의 예술가로 추앙된 것이다. 실제적으로 창작계에서 그는 후세 작곡가들에게는 넘어야 할 ‘거인’이 됐고, 음악학계에서는 체계적인 연구를 토대로 한 ‘베토벤 신화’가 가속화됐다. 독일의 음악학자 에게브레히트(H. H. Eggebrecht)는 ‘고통(Leiden)-의지(Wollen)-극복(Überwinden)’이라는 개념으로 그의 삶과 음악을 연결시키는 수용연구(1972/94)의 초석을 놓았고,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베토벤의 대표적 전기 작가 솔로먼(M. Solomon)은 “궁극적으로 베토벤은 모든 패배를 승리로 돌렸다… 청력 상실의 시작은 그의 ‘영웅적’ 스타일을 성숙시키는 고통스러운 고치였다”라고 평하며, 베토벤 신화 만들기에 박차를 가했다. 미국의 대표적 베토벤 연구자 번햄(S. Burnham)은 『영웅 베토벤』(Beethoven Hero)에서 “베토벤에 의해서 처음으로 인간적 요소들이 음악이라는 예술”에 진지하게 담겼고, “베토벤을 통해 음악이 파토스를 담아내고, 간절한 의지를 품어내며, 인간 영혼에 담긴 드라마틱한 고뇌를 표현”하게 됐다고 주장하며, 삶과 음악에 나타나는 영웅적인 요소를 더욱 견고하게 했다.

이러한 베토벤 신화는 아도르노(Th. W. Adorno)에 의해 형이상학적 의미로 집약됐다. 귀로 사유하는 비동일성의 철학을 주창한 아도르노는 베토벤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며, 자신이 추구하는 철학적 이상을 베토벤 음악에서 찾은 것이다. 아도르노에게 음악이란 “내면을 통과해서 승화된 예술”이기 때문에 주체의 결정체화, 즉 강력하고 대항적인 자아를 필요로 하며, 바로 베토벤이 그러한 자아의 소유자라고 봤다. ‘휴머니즘과 탈신화화’(Humanität und Entmythologisierung)로 베토벤 음악을 특징화했고, 특히 베토벤 후기 작품에서 ‘주체의 죽음’을 통해 유토피아에 대한 이상보다는 현재의 고통, 미래의 희생이 드러나며, 이에 아도르노가 추구한 주관과 객관에 대한 ‘동일성 개념의 폐기’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베토벤의 음악은 철학으로 상정됐고,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철학을 뛰어넘는 진리 구현의 장이 됐다: “베토벤의 음악은 헤겔의 철학이다; 그러나 동시에 베토벤의 음악이 헤겔의 철학보다 더 진실하다. 즉 그의 음악에는 사회를 그대로 동일시해 재생산하는 것이 충분하지 못하며, 그래서 그러한 재생산은 잘못된 것이라는 확신이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아도르노, 『베토벤 음악철학』) 

독재와 낭만의 만남: 히틀러와 김정은의 베토벤

반면 베토벤의 또 다른 얼굴도 간과할 수는 없다. ‘서로 얼싸안아라, 수백만이여!’ 베토벤 9번 교향곡의 유명한 합창 가사는 현실이 됐다. 베토벤 음악은 정치 사회적 맥락에서 대거 활용되며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한 것이다. 1933년 히틀러의 정권 수립 이후 제3 제국 시기를 맞아 음악 문화 전체는 국가 기관에 의해 통제됐고, 음악은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주요 수단이 됐다. 괴벨스(J. Goebbels)는 신문 방송, 영화, 연극, 선전 포스터 등의 대중매체를 총동원해 독일 국민을 히틀러 정권의 충실한 시민으로 변조시켰다. 이러한 가운데 베토벤은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독일민족의 우수성을 보이는 영웅적 모습의 상징으로 사용된 것이다. 예컨대 히틀러가 등장하는 거대한 집회에서 베토벤의 ‘에그몬트 서곡’이 연주되면서 분위기가 고조됐고, 그 순간 독일인의 모든 비평적 능력은 멀리 날아가고, 선언된 모든 거짓말은 그 자체가 진실로 받아들여지는 상황이 연출됐다. 베토벤 음악의 드라마틱한 흐름과 베토벤이 가지는 상징성이 악용된 예라 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북한에서도 베토벤에 대한 관심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최근 음악학자 배묘정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북한이 베토벤에 주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찍이 김정일은 주체사상과 사회주의 혁명 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음악을 활용했다. ‘음악이야말로 도탄에 빠진 인민들에게 난국을 헤쳐 나가는 힘 있는 사상적 무기’며 ‘정치가 없는 음악은 향기가 없는 꽃’이라 하면서 음악을 정치적 도구로 사용하는 가운데, 베토벤이 활용된 것이다. 베토벤 초상은 아이러니하게도 북한의 우표나 주화 등 각종 기념물에 등장했고, 9번 교향곡의 ‘환희의 송가’가 공식 석상에서 연주되기 시작했다. 이 음악은 2001년 스웨덴 총리가 유럽연합 대표단과 평양에 도착했을 때 연주됐을 뿐 아니라, 〈이름 없는 영웅들〉이라는 북한 영화의 배경음악으로 사용되며, 일반 북한 주민들에게도 베토벤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베토벤은 정치적인 선전의 의도가 있건 없건 간에 부지불식간에 북한 문화에 스며든 것이다. 

2013년 김정은의 승계 작업이 진행되는 가운데, 김정은 찬양가인 ‘우리는 당신밖에 모른다’라는 노래가 발표되고 수차례 방송됐다. 그런데 워싱턴포스트의 기사에서 ‘북한의 공식적인 새 뮤직비디오가 발터 머티의 교향곡 5번과 수상할 정도로 비슷하다’라고 지적했다. 발터 머피의 팝 음악 ‘A Fifth of Beethoven’은 베토벤 교향곡 5번의 펑크 리듬 버전으로, ‘김정은 찬양가’에 이 팝 음악과 유사한 부분이 많이 나온다는 것이다. 왜 김정은의 독재 정권은 베토벤의 음악을 활용하고 있을까? 베토벤으로 상징되는 영웅 이미지가 21세기의 북한에까지 영향을 미쳤고, 이에 대외적인 선전도구로 활용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21세기 들어 유럽연합(EU)에서 공동체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과정에 ‘유럽가’(European Anthem)로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를 활용한 점도 주목된다. 현대의 유럽에서도 베토벤은 여전히 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상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예를 통해서 베토벤은 음악 그 자체를 넘어서 정치적 상징성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는 대중적인 영향력과 직결된다.

영화 〈카핑 베토벤〉(2007)에서 베토벤은 ‘내 음악은 미적 감각에 도전해 신의 언어를 전달한다’라고 하면서, ‘신발 바닥에 똥을 묻히지 않고서는 머리를 구름 속에 둘 수 없다’라고 카리스마를 뿜어내며 말하는 장면이 있다. 어쩌면 이러한 베토벤의 모습에서 ‘철학적 의미’와 ‘정치적 영향력’이라는 서로 다른 두 요소는 자연스럽게 연결되기도 하는 것 같다.

베토벤을 다시 생각한다

2020년 베토벤 탄생 250주년을 계기로 올해 전 세계적으로 많은 음악회 및 행사가 계획됐다. 급작스러운 코로나 사태로 현재는 많은 행사가 아쉽게 연기되고 취소되는 상황이었지만, 조금씩 재개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또한 오랜 기간 준비된 저술들이 속속 출간되고 있다. 지난 4월 발간된 『베토벤의 삶과 철학·작품·수용』(한독음악학회 편)에서는 베토벤의 전 작품을 학술적으로 규명하고 있고, 6월 발간 예정인 『베토벤의 위대한 유산』(음악미학연구회 편)은 미학적, 사회정치적 측면에서 베토벤을 들여다보면서, 베토벤 음악에 대한 최신 발간된 베토벤 관련 학술 연구를 다각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최근에는 베토벤을 둘러싼 신화가 고착되고 편파적이었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등장하고 있다. 와타나베 히로시(W. Hiroshi)는 『청중의 탄생』에서 베토벤을 “자신의 가혹한 운명과 싸운 ‘고뇌하는 인간’, 그러나 그 운명에 힘차게 맞서 그것을 극복한 ‘의지의 인간’ 거의 성인의 경지에 도달한 천재 작곡가”로 보는 것을 비판하며 음악학자로서 실증적 연구를 촉구했고, 사회학자 데노라(Tia DeNora)는 『베토벤 천재 만들기: 1792-1803년 비엔나의 음악 정치』에서 베토벤 신화를 강력히 비판했다. “후세 사람들은 베토벤에게 관대했다. 그는 성인 취급을 받았는데, 따라서 음악사의 주류는 베토벤의 천재성에 찬성함으로써 일종의 편견을 고수해 왔다”라고 지적하며, 베토벤의 천재성이 18세기 말 비엔나의 사회적 조직 네트워크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베토벤을 “사업가, 사회적 흥행사, 자신의 경력에 도움이 된다면 교묘한 속임수를 쓸 수 있는 사람”이라고까지 지칭해 학계에 충격을 주기도 했다. 즉 정전(正典)시 돼오던 베토벤이 이제는 새롭게 재조명되고 있으며, 그뿐만 아니라 다른 한편에서 유럽 중심, 남성 중심의 역사서술과 사학자들에 의해 ‘선택된’ 음악가 베토벤에 대한 평가와 서술이 편협한 시각과 지식을 전달한다는 반성적 의식이 시작된 것이다.

이렇게 베토벤은 끊임없이 새롭게 우리에게 문젯거리를 던져주며, 우리를 놓아주지 않는다. 물론 그 원인 중에 중요한 것은 그의 음악이 선사하는 전율과 감동일 것이다. 오늘은 어떤 베토벤을 만나볼까? 코로나로 음악회장도 잘 못 가는 요즘, 왠지 아라우(C. Arau)가 연주하는 소나타 30번을 들으며 이탈리아 두오모 성당의 햇살을 느껴보고 싶은 마음이다.

삽화: 김지온 기자 kion27@snu.ac.kr, 김채영 기자 kcygaga@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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